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얼리 버드(early bird)의 부지런함만으로는 충분한 것 같지 않다. 대통령 혼자서만 뛰는 인상을 주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청와대 비서실의 정무 기능이 뒤떨어져 민심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국회나 여당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않아 보인다.
문민정부 이후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은 모두 정치인 출신이었다. 김영삼 정부(박관용), 김대중 정부(김중권), 노무현 정부(문희상)가 다 그랬다. 새로 들어선 정권이 빨리 자리를 잡자면 관록 있는 정치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때 초대 비서실장은 고려대 교수 출신인 김경원 씨였지만 ‘전통(全統)’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이 없던 시절이어서 비서실의 정무적 기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정치인 출신이라야만 민심과 소통을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무 단색(單色)으로 채워진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이 다양한 민심과 진정한 소통을 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보수 10년 공백 채운 무경험 교수진
청와대 대통령실장과 수석비서관 가운데 3분의 2가 교수 출신으로 채워진 것은 이명박 정부가 처음이다. ‘교수 비서실’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교수 출신이 많다. 류우익 대통령실장을 필두로 수석비서관 8명 가운데 김병국 외교안보수석, 곽승준 국정기획수석, 이주호 교육문화수석, 박재완 정무수석과 중도 하차한 박미석 사회정책수석이 교수 출신이다. 이주호 박재완 수석은 17대 국회의원이지만 치열한 지역구 선거를 치르지 않은 비례대표다. 교수 출신이 많아진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소외됐던 주류 교수들이 대거 한나라당 캠프에 가담했고, 보수 10년 공백기에 공직 경험을 쌓은 사람이 부족한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교수 출신이 국정의 주요 자리를 맡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처럼 처음부터 장관이나 수석비서관 같은 고위직에 발탁되는 경우는 드물다. 국장 또는 차관보급에 기용된 후 민관(民官)을 돌며 능력을 인정받아야만 장관급으로 임명된다. 담당 영역과 교수 시절 전공 분야가 비슷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을 비교해 보는 것도 한미의 교수 출신 기용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스탠퍼드대 조교수로 있던 1986년 합동참모본부 자문관으로 행정부와 인연을 맺었다. 이어 1989년부터 2년간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의 소련 및 동유럽권 담당 보좌관(국장급)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부시가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내가 소련에 관해 아는 것은 모두 라이스가 가르쳐주었다”고 소개할 정도였다. 라이스 교수는 1991년 대학으로 복귀한 뒤에도 공공부문과 기업에서 소련과 동유럽권 국가들에 대한 컨설팅을 계속했다. 2000년 학교를 1년 휴직하고 ‘아들 부시’의 대선캠프에서 외교정책 고문으로 활동한 뒤 국가안보보좌관을 거쳐 2005년 국무장관으로 기용됐다.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은 대미관계를 비롯한 외교, 국운이 걸린 남북관계와 국가안보 분야에서 대통령을 보좌한다. 그러나 김 수석의 전공과 경력에 비추어 이 대통령이 세계 지도자들 앞에서 “외교안보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김 수석이 가르쳐줬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길지 모르겠다.
單色비서실의 소통 한계
김 수석은 미국에서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고교를 졸업하고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하버드대에서 했다. 전공은 멕시코 정치학이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과 멕시코의 사회경제 변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비교연구. 김 수석의 인선 과정도 ‘아버지 부시’ 때부터 키우며 관찰한 라이스 장관과는 달리 갑작스러운 발탁이었다.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정의 중심을 잡는 청와대 비서실에는 경험 많은 일류들이 포진해야 국정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86 참모들의 보고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는 평을 들었다. 지금은 경륜에서 밀리는 청와대 참모들이 이 대통령의 말과 사고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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