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대통령, 이제 마라톤 모드로

  • 입력 2008년 6월 5일 03시 03분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0일 동안 숨 가쁘게 달렸다. 5년간 달려야 할 마라톤 코스를 마치 100m 단거리 달리듯 했다. 잠도 줄이고 휴일에 쉬지도 않았다. 같이 달리는 참모와 공무원들의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났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허망하다. ‘잘했다’는 사람이 20%대 초반에 불과하다. 거리에서는 연일 “하야(下野)하라”는 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국민의 눈높이를 몰랐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그저 모든 것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대통령이란 자리는 그게 아닌 모양이라고 반성한 것이다. 국민을 향해 “모두 저의 탓”이라고 사과도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48.7%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인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을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일까, 세상을 보는 눈이 모자라서인가,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인가. 이 대통령은 지금에야 별의별 생각이 다 들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다시 담기는 어렵지만 지금이라도 차분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만나본 이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 편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숱한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대통령이 돼서도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한 일이면 무엇이든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달리기로 결심했고, 오직 잘 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정부와 청와대의 몸집을 줄이고, 잘 따라줄 인사들로 멤버를 짰다. 복잡한 이념 대신 실용으로 무장하고, 뒷다리 잡는 정치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탈(脫)여의도’를 외쳤다. 길이 좋았더라면 상당한 성과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도처에 장애물이 수두룩했다. 급기야 예상치도 못했던 미국산 쇠고기라는 그루터기에 걸려 지금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제대로 시스템을 못 갖췄고, 인사가 무능하고 편중된 데다, 철학이 없고, 정치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질책을 받고 있다. 달리더라도 전후좌우를 살피고 페이스를 조절했어야 했다.

10년 만의 보수정권 탄생이니 그가 느끼는 심적 부담도 컸을 것이다. 침체된 민생과 경제도 살려야 하고, 좌파세력의 물도 빼야 하고, 훼손된 한미동맹도 복원해야 하고, 왜곡된 남북관계도 바로잡아야 하고, 흐트러진 법과 원칙도 바로 세워야 하고…. 하루라도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 자신의 조급증이 문제였지만 주변에서도 그를 너무 급하게 몰아붙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이 대통령이 추구하는 세상이 아무리 좋고, 다수 국민이 바라는 것이라도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이 잘못되면 성공할 수 없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우선은 무슨 수를 쓰든지 휘청거리는 몸부터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장애물을 말끔히 치우든지, 아니면 뛰어넘든지 선택해야 한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많은 이 대통령이니 결국은 슬기로운 결정을 하리라 본다. 그리고 다시 뛰더라도 그때부턴 마라톤 모드로 바꾸길 바란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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