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촛불은 우리를 비춘다

  • 입력 2008년 6월 11일 02시 58분


도도한 촛불의 물결이 모든 걸 삼키고 있다. 인왕산 그늘에 잠긴 청와대는 촛불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위태롭다. 이명박 정부는 헛발질을 계속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독주와 독선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분노를 축제로 승화시켜 국민주권을 자임하는 한판 대동굿을 이어가는 ‘2008년 6월 서울’의 풍경이다.

한편에서는, 촛불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일대 장관이라고 흥분한다. 시민이 ‘선거 때만 자유로운’ 대의(代議)민주제의 한계를 일거에 돌파하는 광장 정치의 정수라는 것이다. 이들은 수평적으로 연계된 누리꾼의 디지털 공론장이 현실공론장과 만나 폭발적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한국적 참여(參與)민주주의의 진경을 보여 주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의 사태가 민주주의에 내재한 우중(愚衆)정치의 현실화라고 개탄한다. 왜곡되고 부풀려진 ‘광우병 괴담’에 휩쓸린 군중의 발길이 헌정 질서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남용되고 오도된 자유가 국가공동체의 근간을 흔들어 세계체제 안의 무한경쟁에서 한국을 낙오자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당정치의 빈곤 드러내

후세가 ‘2008년 6월의 촛불’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지금은 전자의 평가가 후자의 우려를 압도하고 있다. 민심의 향배가 그렇거니와 언론들 사이의 담론투쟁에서도 촛불을 비판하는 쪽이 열세를 면치 못한다. 한국민주주의의 성장사를 돌이켜보면 그 이유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거대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촛불의 물결은 결국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총체적 경고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역사 자체가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독립된 성찰적 시민사회의 확대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국가에 대항하는 ‘방어적 시민사회’에서 출발해 저항의 능력을 더 키운 ‘운동적 시민사회’를 거쳐 민주적 절차와 규범을 공고히 하는 ‘제도적 시민사회’ 단계로 진입했다. 화염병이 난무하던 과거와 달리 평화적 축제 방식으로 진행되는 촛불 시위는 이런 문화적 축적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의 수사학과 동반한 ‘경제 살리기’ 기치로 집권한 신보수는 한국민주주의의 강력한 제도로 뿌리내린 시민사회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리하여 보통사람이 생활세계에서 민감하게 느끼는 먹을거리 문제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조잡한 시장 논리로 ‘식민화’시킴으로써 시민적 삶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쇠고기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한 이 대통령의 거듭된 실언과 췌언(贅言)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시민사회의 힘과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에서 온다.

촛불은 과연 역동적인 우리 시민사회의 얼굴이다. 하지만 촛불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의 빈곤을 증명한다. 중간 조정과 매개 역할을 맡아야 할 의회와 정당이 제 몫을 못할 때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갈등은 정면 대결로 치닫기 십상이다.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진격’을 외치고 야당이 무책임하게 시류에 편승할 때 대의민주주의는 총체적 위기에 빠진다.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재이지 대체재가 될 수 없는 직접민주제를 대중이 전면적으로 요구할 때 현대 민주주의는 파국에 직면할 수 있다.

나는 예전 칼럼에서 ‘보수의 전성시대가 보수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었다. 이명박 정부의 민심 역주행이 ‘우리 사회 특유의 역동적인 실천의 공간’을 깨울 개연성을 경고한 것이다. 촛불의 바다는 그런 역동적 실천의 공간이 최대화하고 있다는 생생한 징표다. 이에 대응해 이명박 정부와 여당도 자체적 실천 공간을 극대화해야 한다. 즉각 쇠고기 재협상을 수용하고 한반도 대운하를 완전히 포기하며 시민의 눈높이에 부응하는 새 정책과 전면적 인사 쇄신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한다. 이것만이 이명박 정부의 살 길이고 한국 민주주의가 가야 할 길이다.

사회적 대타협 도출하자

촛불이 비추는 개개인의 얼굴은 아름답다. 작은 촛불이 모여 도도한 강물을 이룰 때 그것은 장엄한 느낌마저 준다. 역설적인 것은 밤이 깊어야 촛불이 타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은 그런 어두움을 제공했다. 그러나 촛불은 오래 탈 수 없으며 새벽은 밝아오기 마련이다. 촛불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비약했다는 후대의 평가를 가능케 할 사회적 대타협을 기대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객원논설위원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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