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청해]참을 수 없는 취향의 가벼움

  • 입력 2008년 6월 14일 03시 01분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그걸 조석으로 느낀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좋아하는 주제나 취미별로 끼리끼리 수많은 소그룹이 형성돼 있고, 매일 그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관심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인터넷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요 불가결한 삶의 조건이다. 인류가 발명해낸 교유수단 중 인터넷만큼 전면적으로 개인의 삶 속으로 파고든 방식은 아마 유사 이래 없을 것이다.

인터넷 교유의 특성상 상대가 누구인지, 몇 살이고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자로만 주고받고, 모습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므로 생김새나 성의 구분, 노소, 결혼 여부, 다른 조건들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하고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상대와 교유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그와 통해 있는 라인에서의 관심사가 중요하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력이 부상되지 않는다. 싫으면 곧 상대를 바꾸면 되니까. 또 여러 그룹에 속해 더 많은 상대와 친교하기 때문에 숱한 상대들의 시시콜콜한 이력과 생각, 또 다른 면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런 현상들이 오프라인에서의 사귐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큼하다는 단어가 성행하고 소위 쿨한 관계라는 것이 자랑처럼 번지더니 이제는 중장년, 노년층에까지 퍼진 듯한 인상이다.

상큼하다는 것, 쿨하다는 것은 관계의 속성이 과거처럼 긴밀하지 않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절대적 결속감이나 영원성 같은 것은 사라진, 상대의 본능이나 속성이 보장되는, 또한 내 본능이나 속성도 존중되는, 너와 나 모두에게 또 다른 관계를 열어놓는 상태의 사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제 이런 대화를 시작했다. 너는 검은색을 좋아하니? 나는 꽃무늬를 좋아해. 너희는 하이킹을 좋아해? 우리는 자전거를 타지. 도로를 이용하는 점에서는 같군. 당신 그거 해서 좋았어? 난 이거 해서 좋았어. 여기서 헤어져서 애들은 피자 먹게 하고 우리는 매운탕을 먹자고. 다 먹은 뒤 다시 만나지 뭐.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독재자가 되잖아. 난 히틀러가 되긴 싫다고.

결과적으로 남는 공통분모는 좋았느냐는 것, 기분 좋았느냐는 것, 즐거웠느냐는 것이다. ‘우리’ ‘모두’ ‘똑같이’ 등의 개념은 고루해졌다. 자기 좋았어? 응, 나도 좋았어, 하면 그만인 것이다.

비난과 힐난, 비판은 장미 가시처럼 보인다. 장미만 보면 됐지 가시를 왜 취하겠는가. 이걸 좀 보라고, 이게 예쁘고 좋지 않으냐고, 이게 최고의 가치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사람들은 쳐다보지 않는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뿐 아니라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내 일생을 걸었노라고, 당신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악을 쓰고 분신자살해도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운동권이든, 극우든 일종의 개인 취향으로 여기고 아, 저 사람은 저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 버린다.

사람들은 타인의 취향에 이제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남의 갈비뼈가 부러진 것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아프듯 사람들은 자신의 사소함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 그들에겐 그것이 가치고 관심사다. 남에게 자기의 취향을 강권하는 건 현대의 문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건 매우 촌스럽고 꽉 막힌, 뒷방 노인네의 짓거리와 다름없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로 들어섰다. 아마도 다음 단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변화를 받아들여 적응하는 사람이 더 풍요롭고 너그럽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나이가 몇이든, 누구든 간에.

이청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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