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꽃처럼 마음이 예쁜 민수야

  • 입력 2008년 6월 16일 02시 58분


“이모, 이것 봐, 토마토가 빨갛지? 되게 예쁘지?” 뜰을 지날 때마다 초등학교 2학년 조카 민수는 지난봄 체험학습장에서 갖다 심은 모종이 자라서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본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 꽃화분 키우기, 올챙이 키우기, 모종 키우기 등의 숙제를 내주고 관찰하게 하는 모양이다. 물론 과학적 현상을 가르치는 목적도 있겠지만,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기르는 정서교육을 하기 위한 것일 게다.

정서교육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가끔 어렸을 때 정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지금 모종의 정서불안증을 앓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범불안장애’라는 이 병의 증세는 자율신경계의 과잉 활동으로 ‘괜히 불안해하고 주위가 산만하며, 참을성이 없고, 독선적이어서 남의 비판에 민감하고, 남을 잘 믿지 못하고 피해의식을 갖는 등등…’이라고 하는데, 족집게처럼 나의 증상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요새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닌 듯하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서로 기득권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 보며 줄 바꿔 서고 오늘은 이 말 하고 내일은 저 말 하고, 마치 집단 정서불안증을 앓고 있는 듯, 온 나라를 어수선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초등생 조카의 맑고 환한 얼굴

그런데 프로이트나 애들러의 심리학 이론―어렸을 때 겪은 정서적 불안은 성장한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을 적용해 보면 지금 40, 50대 이후 세대가 정서불안 증세를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전쟁을 겪고, 전쟁 이후에도 척박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보다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마음보다는 싸워 이겨야 하는 투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보다는 남이 먹는 것이라도 뺏어야 하는 독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민수의 방울토마토를 보니 생각나는 일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내준 숙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파리를 잡아 성냥곽 속에 넣어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과궤짝으로 엉성하게 만든 쓰레기통 옆에서 악취를 맡으며 파리채로 파리를 잡아 성냥곽에 채워서 누가 더 많이 잡았나 경쟁했다. 뿐인가, 어느 해는 쥐를 소탕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쥐를 잡아 꼬리를 잘라 오라는 숙제도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집에는 쥐가 없어 어머니가 쌀집에 가서 쥐꼬리를 얻어왔고, 어떤 친구들은 오징어 다리에 물감을 들여 학교에 가져가곤 했다.

지금과 같은 놀이공원은 꿈도 못 꾸는 건 물론, 벼르고 별러 창경원에 소풍을 가서 호랑이 한 마리 보고 끝없이 걷노라면 먼지만 풀풀 날리고 일 년에 두 번 소풍날만 먹는 아까운 김밥 위로 송충이가 뚝뚝 떨어지곤 했다.

물론 이런 추억들도 지금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지만, 정서교육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잘사는 나라의 딕과 제인이 나비를 잡고 다람쥐를 쫓으며 꿈을 키울 때 영희와 철수는 파리를 잡고 쥐를 잡으려고 쓰레기통 옆에 앉아 있었다. 잘사는 나라의 아이들이 펄펄 내리는 눈을 보고 썰매 타고 산타 맞이 ‘징글벨’ 노래를 할 때 우리는 ‘펄펄 눈이 옵니다…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라고 눈이 공짜로 내리는 떡가루이길 바라며 노래 불렀다.

그때 파리를 잡던 손기술, 오징어다리를 쥐꼬리로 만드는 창의성, 눈을 보고 떡가루를 상상하는 헝그리 정신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안정을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슬프게도 악착같이 살아온 우리의 정서와 양심은 많이 퇴화해 버린 것 같다.

과거상처로 정서 불안한 어른들

그렇게 해서 꾸준히 경제발전을 했지만, 6·25전쟁을 겪은 세대는 물론이고 전후 세대들도 아마 우리처럼 많은 정치적 혼란과 시위를 겪으면서 살아온 국민도 드물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젊음의 낭만은커녕 학기마다 탱크가 정문을 지키는 와중에 친구들은 포승에 묶여 잡혀갔고,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TV를 통해 본 한국의 모습은 가슴 아프게도 폭력 시위나 진압의 유혈이 낭자한 풍경뿐이었다. 귀국해 강단에 선 이후에도 최루탄 연기에 학생들과 함께 구토를 하며 수업을 한 적도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이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으니 과거의 상처를 잊고 정서불안증이 치유될 때도 됐는데…. 예쁜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는 민수에게서 희망을 볼 뿐이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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