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허공에 뜬 기도

  • 입력 2008년 6월 17일 19시 57분


이명박 대통령의 민심수습 방안 마련을 위한 여론 청취 앞자리에 종교 지도자들이 서 있었다. 현충일인 6일부터 9일까지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초청된 종교 지도자들의 면면은 대통령이 의견을 듣겠다던 ‘각계 원로(元老)’의 앞자리에 설 만한 분들이었다.

한국의 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2497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불교 기독교 가톨릭 신자가 각각 총인구의 22.8%, 18.3%, 10.9%에 이른다고 한다. 대통령이 신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할 수 있다면 민심을 수습하는 길은 열릴 법하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과의 회동은 이 대통령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기회였다.

들러리 서고 만 종교 지도자들

유감스럽게도 청와대 회동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회동 장면과 대화 내용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실망을 안겨주었다.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 이후에 촛불시위는 더 격렬해졌고 내각은 견디다 못해 총사퇴 결정을 했다. 그런 부실한 회동이 수습책의 밑거름이 된다기에 복습하는 셈 치고 되돌아본다. 다른 종교는 잘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 지도자와 대통령의 회동에 초점을 맞춘다.

7일 유명한 목사 여러 명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대통령은 그들과 상춘재에서 오찬을 하고 앞뜰로 나가 등나무 의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사진 속의 대통령과 목사들은 한결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평상시라면 좋은 모습이고 좋은 사진이다. 그러나 지금이 그런 여유를 부릴 때인가. 목사들은 점심 먹을 곳이 없어서 청와대에 간 것이 아니다. 대통령도 함께 차를 마실 사람이 없어 그들을 초청한 게 아니다. 기독교 목사들은 흔히 어려울 때 금식(禁食)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매달린다. 장로 대통령이 목사들과 한가한 장면을 연출하는 대신 점심을 굶어가며 위기를 해소할 지혜를 달라고 합심(合心)해 기도했다면 많은 신자와 국민이 마음을 돌렸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필자는 나름대로 간절히 기도했다. 지지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통령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장로인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느끼며 하나님께 머리를 숙였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택하는 세속적인 행사에 왜 종교를 결부시키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국가와 지도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우리나라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기도는 간단했다. 앞으로 5년간 국민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새 대통령을 이끌어 달라는 기원이 전부였다. 5년 내내 국민을 불안하게 했던 전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그런 소시민적 기도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00여 일이 경과한 지금 내 기도는 허공에 떠 있다. 7년 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위해 했던 기도까지 떠올라 마음이 답답하다. 2001년 1월 20일 미국 워싱턴 의사당 앞에서 열린 부시의 취임식에서 두 명의 목사가 기도를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와 흑인인 커비존 콜드웰 목사였다. 미국인은 아니지만 취임하는 대통령과 같은 기독교 신자 자격으로 기도에 동참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목사들의 기도에 덧붙인 것은 세계평화였다. 7년이 지난 지금 부시는 내 기도와는 정반대로 세계평화를 깬 인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元老보다 賢者가 필요하다

청와대 회동이 남긴 교훈은 위기를 재는 대통령의 잣대가 국민의 잣대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이름만 그럴듯한 원로보다는 정확하게 시국을 진단하고 해법을 내놓을 현자(賢者)가 필요하다는 것도 확인됐다.

부시 대통령은 측근을 대거 고위직에 기용한 데 대해 비판이 나오자 이렇게 대꾸했다. “주인공 주변에 수류탄이 날아와 구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누군가 수류탄으로 달려가기를 원한다. 내 주변엔 그렇게 할 사람이 20명도 넘게 있다.” 이 대통령 주변엔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보호하겠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이는 말로 되는 게 아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