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일본인 납치 문제,이번에는?

  • 입력 2008년 6월 18일 20시 32분


일본 정부가 7일부터 나리타(成田)와 하네다(羽田)공항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30초짜리 비디오를 상영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비디오에는 일본 정부가 납치됐다고 인정하는, 그렇지만 안부가 확인되지 않은 12명의 피랍자 얼굴 사진과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디오를 일본의 관문인 두 공항에서 상영하는 것은 내달 홋카이도(北海道) 도야(洞爺)호에서 열리는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와 관계국 장관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입국할 해외 언론인을 의식해서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가까스로 협상테이블에 앉은 북-일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는 일본에서는 예리한 양날의 칼이다.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까딱 잘못 건드리면 정권이 휘청거릴 부비트랩이다. 한국을 찾는 학자나 정치가들에게 북-일 관계를 물어보면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납치 문제에 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 그만큼 일본의 국내 여론은 이 문제에 대해 강경하다.

북한은 일본의 국내 여론을 애써 무시해 왔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피랍자 13명 중 8명은 사망, 5명은 생존해 있다고 밝혔고, 생존자 5명은 이미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니 이 문제는 끝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피랍자가 더 있으니 꼼꼼하게 조사해 납치 경위를 분명히 밝히고 생존자는 일본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다. 일본은 ‘납치 문제 해결 없이는 국교정상화도, 경제지원도 없다’고 배수진을 쳐 왔다. 그러다 보니 양국은 상당 기간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

며칠 전 극적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북한은 납치 문제를 재조사하고, 일본은 경제제재를 일부 완화한다는 것이 합의의 골자다. 일본의 6개 중앙일간지는 이 소식을 모두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몇 개 면씩 해설기사를 실었다.

북-일 합의를 들여다보면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가 협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북한이 이번 합의에 응한 것은 일본이 졸라서가 아니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지기 위한 화해 제스처의 성격이 더 짙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6자회담 참가국들로부터 북한의 핵 문제보다 납치 문제 해결에 더 신경을 쓴다는 눈총을 받아 왔다. 북한이 기존 주장을 굽히지 않는 데다 북핵 문제가 해결국면을 맞는 단계에서 일본으로서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됐다.

한미일의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오늘 도쿄에서 만나 회담 재개 문제를 논의한다. 북-일 간에 모처럼 화해무드가 돌고 있으니 회의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북-일 문제가 양자현안이 아니라 국제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일본 정부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지만 역풍이 만만찮다는 게 고민이다. 북한을 더 세게 몰아붙여야만 납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피랍자 가족모임은 불만이다. 정부 고위 관료와 의원들 사이에서도 제재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북한이 재조사를 하는 척만 하고 “더 이상 납치피해자는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여러 차례 북한에 속았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이젠 한국도 문제해결에 힘 보태야

제일 좋은 해결 방법은 북한이 성의를 갖고 재조사를 하는 일이다. 재조사 과정에 일본이 참여하는 문제도 검토해볼 만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번에도 일본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북-일 간의 불신은 더 깊어질 것이다.

한국도 역할을 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은 일본의 ‘외로운 노력’을 외면했다.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할 말은 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이 문제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정보가 있다면 공유해야 한다. 일본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국격(國格)을 위해서다.

아사히신문은 이번 합의를 ‘동상이몽의 양보’라고 표현했다. 양국이 같은 침대에서 다른 꿈이나마 꾸면서 사이를 좁혀 나갈지, 아니면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또다시 삿대질을 하며 헤어질지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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