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진실에 무릎 꿇은 김경준 vs 변명하는 정치인

  • 입력 2008년 6월 20일 03시 01분


“저는 당시 너무나 큰 두려움에 휩싸여 검사님의 진심을 왜곡하고 분노라는 화살을 쐈습니다.”

BBK 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전 BBK 대표 김경준(42) 씨가 최근 수사 검사에게 참회의 글을 보냈다. 무릎을 꿇고 사과까지 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에서 몰려든 취재진을 보며 “와우(Wow)”라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짓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수사를 받던 중 검사가 자신을 회유 협박했다고 강변하던 목소리도 오간 데 없다. 지난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돌연 입국해 각종 거짓말로 국민과 정치권, 여기에 가세한 일부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들을 농락한 장본인이 결국 진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김 씨는 국내에서 수백억 원대의 소송을 떠안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액주주 피해자들이 최근 “투자금 손해를 배상하라”며 배상명령 재판까지 신청했다. 국내에서 김 씨의 민사상 책임을 묻는 재판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리학자들은 김 씨가 그동안 보여준 뻔한 거짓말을 ‘뮌히하우젠(M¨unchhausen) 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전쟁에 참전한 독일군 뮌히하우젠은 1760년 퇴역하면서 자신이 능숙한 사냥꾼이자 만능 스포츠맨이라고 허풍을 늘어놓았다. 결국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이란 책까지 출간됐다. 병적으로 거짓말을 하다 그 거짓말에 도취돼 버리는 현상을 빗댄 얘기다.

김 씨는 참회의 길을 걸었지만 거짓 의혹을 퍼 나른 일부 정치인은 아직 ‘뮌히하우젠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일부 언론도 과오를 반성하는 모습이 아니다.

BBK 사건과 관련해 기소돼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은 정봉주 전 통합민주당 의원은 “재판부가 (BBK 사건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변호를 맡은 같은 당 송영길 의원도 “이명박 대통령이 BBK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국민 대부분은 이 사건에 여전히 의혹을 갖고 있다”고 거들었다.

지난해 우리 사회는 김경준 씨 사건과 신정아 씨의 학력위조 사건으로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무너지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믿음이 빛바랜 사회에서 법치주의의 싹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 지도층인 정치인들이 진실의 촛불 앞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게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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