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무크는 두 가지 상반된 방식으로 이스탄불에 접근한다. 하나는 내밀한 경험이다. 가족과 친구, 첫사랑 소녀와의 때론 따듯하고 때론 부끄럽고 때론 아득하고 먹먹한 순간들. 또 하나는 객관적 자료다. 특히 파무크는 네르발, 고티에, 플로베르의 시문에 기대어 서양인의 시선에서 이스탄불이 어떻게 품평되었는가를 소상히 짚는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견해를 갖기까지 오랫동안 고뇌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하여 파무크가 발견한 이스탄불이란 도시의 특징은 ‘비애’다. “이스탄불에서 비애는 음악의 중요한 분위기이며 시의 기본적 단어일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정신상태 그리고 도시를 도시이게 만든 재료의 암시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내세운 슬픔이 서양인의 죄책감과 동정심이 혼합된 감정이라면, 이스탄불 시민들이 늘 젖어 지내는 비애는 도시가 자랑스럽게 흡수하려고 했던 긍정적인 정신상태다. 비애를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스탄불의 비애는 근대가 낳은 성공을 향한 도전과 질주에 명백히 반대하면서, 빈곤과 혼란을 실패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어떤 영광으로 지속시킨다. 돈, 연인, 성공 앞에서 의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 비애의 역사적 흐름을 훑고 자의식을 담기 위해, 파무크는 이스탄불을 떠나지 못한 채 거듭 이스탄불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두툼하고 아름다운 책을 덮으니 “내가 나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때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문장이 가슴을 찌른다. 1987년과 2002년 그리고 2008년 서울시청 앞 밤 풍광을 뉴스로 자주 접하는 6월이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광장으로 몰려든 모습만 같을 뿐 욕망도, 구호도, 깃발도, 미련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서울시민이라도 분노와 짜증과 두려움과 비아냥거림과 아픔이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출렁인다. 이토록 다른 6월 항쟁과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과 촛불 행진을 아우르는 단어를 하나만 꼽는다면?
서울을 수식하는, 혀에 착착 감기는 밝고 희망찬 형용사가 벌써 많이 등장했다. 이토록 멋진 형용사는 어디서 왔을까. 여기에 서울을 만들고 지키고 성장시킨 시민들의 희로애락이 담겼을까. 유행처럼 머물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서울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이 마비의 변명이 될까. 짧게는 20년, 길게는 근대 이후 100년이란 시간이 쌓인 서울을 어떤 단어로 틀어쥘까. 파무크가 서울 시민이었다면,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이 도시의 핵심어로 무엇을 꼽을까. 개화기에 버드 비숍을 비롯한 서양인들이나 35년간 군림하며 식민사관을 가르친 일본인들이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언급한 적은 있지만, 파무크가 ‘이스탄불’에서 했던 것처럼 근대 이후 서울을 관통하는 개념이나 감정을 추억과 자료로 버무려 펼치는 글쓰기는 없었다. 예술가여, 너 자신을 알고 싶다면 서울을 통째로 삼켜라. 딱 한 번 기침하라!
김탁환 소설가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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