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이 확전(擴戰)으로 치닫던 1964년 9월 11일. 한국 해군의 상륙함(LST)은 부산항을 출발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배에는 군의관인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국군 장병 140명이 타고 있었다. 이어 1965년 3월에는 비전투부대인 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이 베트남에 파병됐다.
베트남 전투사단 파병안은 같은 해 8월 13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 조치로 10월 9일 해병대인 청룡부대가 포성이 그치지 않는 베트남 꾸이년에 상륙했다. 건군 이래 첫 ‘전투병’ 해외 파병이다. 이어 10월 23일엔 육군맹호부대가, 이듬해인 1966년 9월 22일에는 육군백마부대가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첫 파병 후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 동안 연인원 32만 명의 국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은 4407명이 전사하고 1만7060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국군은 4만1000여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
1965년 5월 미국 존슨 대통령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미국 CIA리포트는 적고 있다. “한국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킨다는 신호가 워싱턴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얘기는 베트남에 대한 협조를 매우 어렵게 한다.”
박 대통령은 1967년 대전 유세에서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안 보내려면 안 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면 미 국방부에서 한국에 있는 미군을 빼서 베트남으로 이동시켰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투부대 파병은 박 대통령의 ‘국방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실제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의 해외근무 수당은 총 2억3556만 달러나 됐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다. 한국 기업들은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미국의 군사원조와 국군의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은 호황을 맛봤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 불과했지만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엔 5배가 넘는 541달러였다.
베트남전 파병을 바라보는 눈은 다양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에 이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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