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성직자의 촛불

  • 입력 2008년 7월 2일 20시 07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미사를 올리고 행진을 하면서 동력을 잃어가던 촛불시위에 다시 힘이 붙고 있다. 밖으로 비치는 것은 촛불을 든 신부와 수녀들뿐이지만 천주교 내부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천주교 주교회의 관계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촛불 미사’가 천주교 전체를 대표하는 견해로 비칠까봐 걱정했다. 그는 “사제단은 천주교의 공식기구도 아니고 대표기구도 아니다. 이번 사제단의 시국미사는 천주교의 공식의견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촛불시위에 관해 가톨릭 내부에서 정의구현사제단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이 시국미사를 올리는 것이 처음이 아니어서 대체로 관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달 29일 로마로 출국할 때 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미사를 올리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고 한다. 신자들의 반응도 다양한 것 같다. 한 가톨릭 신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촛불시위 방향을 비폭력으로 틀어준 것은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신자는 “촛불시위가 활활 타오르던 초반이 아니고 동력을 잃어가는 시기에 이렇게 나서는 것은 생뚱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일부 신부와 수녀가 촛불을 들면서 불교와 개신교의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1일 오전 한승수 총리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에게 예정에 없던 면담을 청했다. 오후 2시 40분으로 약속을 잡은 지관 스님은 뜻밖의 내부 신중론에 부닥쳤다. 4일 불교계가 주최하는 시국 법회를 앞두고 “정부가 정지작업을 하려는 의도로 비칠 수 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결국 지관 스님은 오후 2시 25분 갑자기 연기를 통보했다.

4일 시국법회는 종단 밖 불교시민단체뿐 아니라 서울 화계사 봉은사와 강원도 월정사 등 대형 사찰 주지 스님들이 추진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인사 수덕사 통도사 등 주요 교구 본사 승가 대학생들과 신도들까지 총 1만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게 불교계의 전언이다. 종단 관계자는 “시국과 관련한 법회는 민주화 요구가 높았던 1980년대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불교계 집회에는 ‘쇠고기’ 차원을 넘어 새 정부 출범 이후 불교계의 서운함까지 깔려 있다.

3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시국기도회도 예정되어 있다. 20년 전 6월 민주항쟁에서 사제단의 활동은 감동을 주었지만, 두 달째 시위가 계속되는 지금 상황에서 사제단의 촛불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갈래다. 서울광장에 입장하던 상당수 사제는 ‘명박 퇴진’이라고 쓰인 종이 피켓을 들었다. 민주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에 대해 사제복을 입은 신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은 신자도 많을 것이다.

시위대의 인권도 있지만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하는 경찰도 있다. 생계를 위협받는 영세 상인들의 생존권도 있다. 식품 안전이 걱정되어 미국산 쇠고기가 싫다는 사람도 있지만, 3억 미국인이 먹는 쇠고기를 기피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산 쇠고기 판매점에 주문이 몰리고 있다.

세속을 등지고 출가한 수행자들은 덧없는 세속정치 앞에 세속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설 것이 아니라 종교만이 할 수 있는 진정한 치유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종교가 궁극적 목표로 삼는 ‘보편적 사랑’을 시대에 맞게 그들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실천했으면 좋겠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