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다가 밤을 하얗게 새워버리고 새벽 창을 두드리는 종소리를 가만히 듣곤 하였다. 그러면 새벽 종소리가 산길을 내려오면서 숲의 나무를 흔드는 느낌이 전해온다. 마치 산들바람처럼 종소리가 새벽 숲을 흔들면 전나무와 호랑가시나무와 너도밤나무가 각각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각각의 음색을 낸다.
이윽고 종소리는 산길을 내려와 동네로 접어든다. 종소리는 가난한 동네의 삐뚤빼뚤한 골목길을 올라오면서 새벽에 배가 고파 엄마를 깨우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섞이고, 숨을 헉헉대면서 높은 골목길의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고단한 어깨를 스친다. 그렇게 하여 내가 사는 집까지 도착한 종소리는 밤늦게까지 글을 쓰고 책을 읽은 백면서생에게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낮 동안의 소음으로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진정한 자연과 삶의 속내를 댕댕댕 들려준다.
러시아의 마지막 농촌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은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가죽 옷으로 옭아매듯, 인간이 자연을 시멘트 속에 가두어 놓고 있다.” 예세닌의 이 말 속에는 사회주의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계공업 시대로 접어드는 조국의 모습 속에서 옛 농촌을 사랑하는 시인의 고뇌가 담겨 있다. 예세닌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은 과거의 마을 공동체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초원지대, 숲, 들판 등 모든 자연이 보존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인간이 시멘트 속에 가둬놓은 것은 과연 자연의 모습뿐일까.
나는 현대 문명에 의한 자연의 훼손보다 어떤 면에서는 자연의 소리가 사라져가는 점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훼손은 사진이나 도면 등 시각적인 도식에 의해 사람이 심각성을 지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정보로 파악하는 반면에 사라져버린 소리는 건축가의 도면이나 지리학자가 그린 등고선 지도처럼 뚜렷하게 남을 수가 없다. 가난하고 욕심 없이 살았던 옛사람이 뒤뜰에 배추밭을 가꾸고, 저녁이면 짚으로 이엉을 댄 오두막에 들어앉아 옛날 노래를 부르며, 집에서 기르는 가축과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는 그런 소리는 어떤 도면으로도 그릴 수 없다.
현대 도시는 인간이 만든 기계문명에 의한 각종 소음공해로 골치를 앓는다. 자연의 소리가 아닌 인위적인 소리는 현대인을 귀머거리로 만든다. 공장 소음, 자동차의 경적, 크게 틀어놓은 길거리 상가의 최신 가요까지 소음공해는 인간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진실을 차단한다. 이런 사회에서 소리를 가려들을 수 있는 능력, 즉 투청력의 회복은 절실한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다. 비온 뒤 거리의 보도블록 사이에서 풀이 솟아나오듯, 인간 문명이 남긴 시멘트에 의해 감금되어버린 자연의 소리를 다시 회복하는 일은 절실할 수밖에 없다.
내가 오전 다섯 시에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기다리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새벽 종소리에서 소박하지만 다시 청각 우위의 상태로 돌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일은 개발과 발전의 굉음에 무너지는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작은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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