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과 암자서 보낸 꿈같은 휴식
돌이켜 보니 젊어서나 나이를 먹어서나 보람 있는 휴가는 사람이 많이 몰리는 유명 피서지보다는 이름이 안 알려지고 한적한 곳에서 경험한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과외 지도를 하던 학생들을 데리고 동해안 유명 해수욕장으로 휴가를 떠난 적이 있었다. 해변이 너무 지저분하고 풍기가 문란해 도저히 머무를 수가 없어 1시간 정도 바닷가를 걸어 올라가니 조용한 어촌 마을이 나왔다. 마을의 어른을 찾아가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니 인근 학교 교실 한 칸을 숙소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낮에는 한적한 바닷가에 나가 수영을 하고 밤에는 야간자습을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주일여를 보냈다. 새벽에 바닷가에 나가 갓 잡아온 생선을 사 찌개를 끓여 먹고 바닷가에서 직접 잡은 조개로 탕을 만들어 먹었다. 잊지 못할 추억이다.
최근 들어서는 ‘무소유’의 법정 스님을 모시고 남해안 일대를 3박 4일간 순례한 일이다. 낮에는 여수 해남 강진의 사찰과 문화 유적지를 두루 둘러보고 밤에는 스님의 암자인 불일암으로 돌아와 다담(茶談)을 나누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다산 정약용이 18년 유배 생활 중 11년을 보내며 500권의 책을 저술한 강진의 다산초당과 고산 윤선도 고택인 해남의 녹우당을 찾아간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밤에 불일암 마당에서 달빛을 받으며 ‘탁’ ‘탁’ 소리를 내면서 꽃망울을 터뜨리는 달맞이꽃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驚異)였다. 스님이 서재에서 차분히 읊조리시던 미당(未堂)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한여름에 한꺼번에 가야 하나
지나간 추억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더욱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휴가가 한여름에 너무 집중돼 있다는 현실이다. 주 5일 근무에다 겨울 휴가를 주는 곳도 많아 지나친 쏠림 현상이 고쳐질 때도 됐지만 여전히 여름휴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 보니 휴가지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 받고 바가지요금에 시달리기 일쑤다. 따라서 이제는 휴가시기 분산에 대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한여름이 아닌 철에 휴가를 가는 이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는 방안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들 형편에서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동반하는 문제가 있으니 교육당국도 이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배려가 있어야 한다.
여행을 많이 해 본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3월과 11월 중순을 휴가철로 추천하는 이가 많다. 3월은 남녘의 산수유와 매화 구경이 그만이고, 11월은 소슬한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손님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고, 바가지요금도 드물어 경비도 절감된다고 한다. 봄나물이나 해산물 등 제철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여행을 가는 대신 사회시설 같은 곳에서 봉사를 하며 땀을 흘리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보람 있는 휴가라고 얘기하는 이도 많아지고 있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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