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금강산 총격은 北의 ‘體制범죄’다

  • 입력 2008년 8월 1일 20시 00분


북한군은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를 100m 이내 거리에서 조준해 사격한 것으로 정부 합동조사단에 참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모의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100m 이내에서 두 발을 명중시킬 정도라면 박 씨가 치마를 입고 있었으므로 북한군 초병은 해변에 산책 나온 여성 관광객임을 알아봤을 것이다.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지구의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에 따르면 관광지역을 이탈한 관광객에 대해서는 신원을 확인하고 범칙금을 부과하면 된다. 군사지역에 들어왔던 여성이 검문을 받지 않고 나갔더라도 결국 북한군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뒤에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민간인의 출입을 엄중하게 통제해야 할 중요 군사시설이었다면 엉성한 플라스틱 펜스가 아니라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게 철조망을 치고 입구에 초병을 세워 외부인이 못 들어오게 사전에 차단했어야 옳다. 표지판도 제대로 세워놓지 않아 산책을 하다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군사지역에 들어간 관광객을 초병이 조준 사격한 이 사건은 북의 주장대로 ‘17세 소녀 신병의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체제(體制)범죄’에 해당한다. 체제범죄는 독재국가가 그 체제를 유지, 존속시키기 위해 자기네 스스로는 처벌하지 않지만 인륜(人倫)이나 국제기준에 비추어 범죄에 해당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여성관광객 알고도 조준 사격

통일 독일은 동독의 체제범죄를 찾아내 모두 재판에 회부했다. 동독 군인들은 동베를린에서 철조망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주민을 사살했다. 동독 초병의 총격은 독일사회주의통합당(SED) 서기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와 국방위원들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다. 동독 주민의 서독 탈출을 저지함으로써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뒤 월경(越境)하는 주민에게 총을 쏜 초병들은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한 도구’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무단 월경자를 체포해 벌금을 물리거나 징역을 살리는 것은 몰라도 생명을 빼앗은 것은 반(反)인륜 체제범죄였기 때문이다

동독 붕괴 후 호네커를 기소한 주요 혐의도 바로 국경지역 탈출자들에 대한 총격명령이었다. 그는 모아비트 구치소에 수감돼 12회에 걸친 공판을 받았다. 그러나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 사망할 것이 확실한 말기 간암환자에 대해 재판을 계속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는 구치소에서 석방돼 칠레 산티아고로 떠난 지 1년 4개월 뒤 사망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 납치, 외교 순방 중인 대통령 일행에 대한 버마 아웅산 테러, KAL 858기 공중폭파도 북의 체제범죄에 해당한다. 현행 북한체제에서 이런 사건의 수사나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체제범죄는 그 범죄를 저질렀거나 감싸는 독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시효(時效)가 정지된다고 보는 것이 문명국의 공통된 법률 해석이다.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군부세력이 시효 15년이 지난 뒤 처벌받은 것도 그들의 집권기간에는 시효가 정지된다고 본 법률논리에 따른 것이다.

통일 독일이 동독 정권에서 반인륜 체제범죄의 수립과 실행에 가담한 자들을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 중앙법무기록보존소의 활동 덕분이었다. 법무기록보존소는 동독의 체제범죄를 계속 수사하고 기록을 보존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활발하게 펼칠 때 동독 권력층은 집요하게 법무기록보존소의 폐지를 요구했다. 동독 권력자들은 언젠가 통일이 된 후 자신들의 죄과를 따질 기록이 차곡차곡 법무기록보존소에 쌓이는 것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동독 권력층은 법무기록보존소의 활동이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며 끈질기게 폐쇄를 요구했다. 그러나 브란트 총리는 동독에 ‘퍼주기’ 원조를 하면서도 법무기록보존소 폐지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김하중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박사학위 논문 ‘체제불법 청산방안에 관한 헌법적 고찰’에서 인용)

통일後처벌받은 東獨초병들

북이 금강산 총격의 현장 공동조사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걸 보면 총을 쏜 초병과 지휘 감독책임이 있는 상급자를 처벌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무고한 관광객에게 총격을 가한 이 사건 관련자들도 통일이 된 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국가정보원 안에 독일의 법무기록보존소 같은 기구를 만들어 통일 후의 수사와 재판을 위한 기록을 작성해 계속 보존해야 한다. 이 같은 기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민 인권유린과 체제범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북한의 권력집단과 하수인들에게 상당한 압박수단이 될 것이다. 반인륜 체제범죄의 처벌에 시효가 없음을 북한의 권력층과 군부에 똑바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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