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정연주 사장 지키기를 ‘방송장악 저지’ ‘공영방송 수호’로 둔갑시킨 진보좌파진영의 주장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연주의 ‘KBS 장악’ 행적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민주당의 정세균 대표도 나섰고, 기자에게 정 사장에 대해 아쉬움을 표명했던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앞장서고 있다.
정 사장은 노무현 정권 출범 직후인 2003년 4월 취임했다.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언론고문을 지낸 서동구 전 사장이 9일 만에 물러난 뒤였다. 진보좌파진영은 서 씨를 낙하산이라며 반대했다. 노 대통령이 서운해할 정도였다.
정 사장은 한겨레 논설주간 시절 40여 편의 칼럼에서 반미 반보수(신문) 반이회창을 격하게 외쳤다. “빗자루로 쓸어버려라”고 선동도 했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 직후 한겨레에 들러 감사의 표시를 할 만했다. 정 주간의 글에 비하면 서 씨의 언론고문 활동은 티도 나지 않는다. 서 씨가 낙하산이면 정 사장은 ‘왕 낙하산’이다.
진보좌파진영이 서 씨를 반대한 이유는 자신들과 동지적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시 정 주간 등을 사장 후보로 무게 있게 고려하라고 이사회를 압박했다. 정 사장은 노 대통령과 KBS 노조위원장 등이 참석한 청와대 만찬에서 낙점됐다. 이날 밤늦도록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축배의 잔이 올랐다. 청와대 측도 참석했다. (서 씨는 나중에 정 사장의 추천에 힘입어 스카이라이프 사장이 됐다.)
정 사장은 취임 3일 만에 본부장급 임원들에게 일괄 사표를 받았다. ‘인적 청산’이란 말이 나돌았고 사표는 전격 수리됐다. 당시 지명관 이사장은 “혁명적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정 사장은 노조 집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동지애를 과시했다. 중견 간부들에 대한 인사 조치도 강행됐다. 한 심의위원은 숙청이라고 했다. 그만큼 신속하게 KBS를 장악한 사례도 없었다.
이후 정연주의 KBS는 ‘탄핵방송’ ‘송두율 프로그램’ ‘미디어 포커스’ 등에서 보듯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들고 편파 논란을 낳았다. 수신료 현실화를 엄두도 못 낼 만큼 신뢰를 잃었다.
2006년 9월 정 사장의 연임 과정도 낙하산과 억지의 합작품이었다. 노조는 정 사장의 연임에 반대했다. 정 사장 3년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사장추천위원회가 무력화됐고 정 사장은 재입성했다. 이사 2명이 사퇴했고, 정 사장은 한동안 노조 몰래 기습 출근해야 했다. 청와대는 “노조에 문제가 있다”며 정 사장을 편들었다.
그의 연임 뒤 KBS는 찬반 세력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됐다. 경영 상태도 악화됐다. 정 사장은 올해 초 퇴진을 요구하는 노조위원장에게 “회사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협박까지 했다.
이처럼 간단히 살피더라도, 정 사장은 지난 정권의 낙하산이자 셀 수 없이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노조는 그를 적자의 귀재라며 경영 실패의 책임을 묻고 있다.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에 대한 말 바꾸기는 아직 생생하다.
이런 정 사장은 진보좌파진영의 주장처럼 ‘공영방송 수호자’가 아니라 ‘방송 장악의 상징’이다. 정 사장 교체는 그것을 걷어내는 첫 단계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KBS 사장 해임권 논란은 좌파진영의 주장에 말려들어 정 사장을 ‘희생양’으로 만들기 쉽다. 그보다 정 사장의 지난 행적을 따져보자. 답이 명확하지 않은가?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