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교섭단체가 뭐기에

  • 입력 2008년 8월 7일 03시 01분


잠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착시(錯視)에 빠졌다. 그제 한나라당의 민생투어 현장에서는 느닷없이 ‘충청 홀대론’이 터져 나오더니, 어제는 자유선진당이 창조한국당과 함께 국회에 교섭단체 등록을 마쳤다. ‘충청 홀대론’ ‘충청 푸대접론’ ‘충청도 핫바지론’은 과거 JP(김종필)의 단골 논리였다. 국회 의석 18석의 선진당이 한국당(3석)과 합쳐 교섭단체의 꿈을 이루는 장면도 8년 전 JP의 자민련을 연상시킨다. 16대 총선에서 17석을 얻은 JP는 결국 DJ(김대중)의 민주당한테서 의원 3명을 꿔오는 ‘희대의 편법’을 동원한 끝에 교섭단체 등록에 성공했다.

선진당 이회창 총재를 ‘제2의 JP’라고 하면 JP가 역정을 낼 것이고, ‘JP의 아류(亞流)’라고 ‘격(格)’을 더 낮춰 말하면 이 총재가 억울해할 것이다. 이 총재는 1997년 대선 때 측근들이 “어떻게든 JP를 잡아야 한다”고 했지만 뿌리쳤다. JP를 부패 정치인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총재는 그리 억울해할 것도 없다. 소속 의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한국당에 부랴부랴 손을 내밀었다고 치자. 그래도 그 당의 성격을 안다면 JP의 아류라는 말에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이다.

4·9총선에서 지역구 1석(문국현)에 비례대표 2석을 얻은 한국당은 최근 중앙선관위에 회계보고를 하면서 비례대표 선거운동 비용으로 3억7400만 원을 썼다고 신고했다. 추잡한 사기 전력이 많고 현재 구속수감 중인 이한정 의원이 당에 건넨 돈이 5억9000만 원이었다. 액면 그대로만 따지면 한국당은 ‘이한정의 돈’으로 비례대표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다소 거친 논리를 동원했지만 구구하게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정통 보수를 대변하는 이회창이 어떻게 ‘문국현류(流)’와 손을 잡을 수 있느냐는 질타는 차라리 가벼운 축에 든다. ‘차떼기’로 정치를 더럽힌 이회창이 이젠 사기꾼의 힘까지 빌려 교섭단체 자리를 샀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 총재가 그나마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제3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었는데, 딱하기 짝이 없다.

정작 딱하게 된 것은 선진당을 지지한 충청, 특히 대전·충남 유권자들이다. 선진당이 지역당이라고 하지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지역당 아닌가? 크기만 다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젠 지역당을 우리 정치와 국회의 기본 운영단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성은 이미 이념과 정책을 포괄하는 당파성(黨派性)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영호남 외에 ‘몰표’로 그런 지역적 당파성을 보여준 곳은 충청권뿐이다. 교섭단체라는 게 국회 운영의 기본단위라면 의석수만 가지고 대전·충남의 민의를 ‘홀대’해선 안 된다. 국회법상 교섭단체 요건(20석)이 무슨 불변의 원칙도 아니다. 6대 국회 때는 10석이었다. 전체 의석(175석)의 5.7%였다. 18대 국회(299석)에 대입해보면 17석(5.6%)에서 18석(6.0%)이다.

괜히 국회법을 조롱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국회법이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낯 뜨거운 편법만 부추긴다면 고치는 게 백번 옳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대전·충남에 교섭단체의 지위를 허(許)하라!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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