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기업 선진화 방안’ 마련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공기업 임원을 피해 전화까지 가려 받는다.
그는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통사정을 하지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 공기업 사람들과는 일절 약속을 잡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관계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르던 공기업의 국회 담당 직원들이 요즘은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한다”고 귀띔했다.
통합 대상으로 거론되는 한 공기업은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총동원돼 통합의 부당을 주장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편으론 흑색선전도 난무한다.
A사는 지난 정권에서부터 일찌감치 한나라당에 줄을 대 이번에 B사와의 통합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거나, C사는 사장이 지난 총선에서 해당 지역구 의원을 적극 지원하지 않아 미운털이 박혔다는 식이다. 공기업 개혁을 정치적으로 비비 꼬아 정당성을 희석하려는 의도다.
공기업들의 이런 로비는 과거 정권에서 배운 학습 효과라는 지적이 많다. 공기업 구조조정이 매번 정권 초기에만 반짝할 뿐 결국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난 사례를 여러 번 봐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와대는 최근 공기업 개혁을 본격화하기도 전에 ‘공기업 선진화’라는 모호한 표현을 써가며 구조조정 방안을 각 부처에 맡겨 버렸다. 공기업들이 각 부처의 장차관이나 고위 공무원들의 퇴직 후 자리보전용으로 자주 이용됐고, 전직 국회의원이나 총선 낙선자, 대선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사장이나 감사직을 꿰차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개혁 의지의 후퇴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11일 발표될 선진화 방안에서 민영화 대상은 몇 개에 불과하고 상당수는 자체 경영혁신 대상으로 분류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305개 공기업에 정부가 쏟아 붓는 국민혈세는 연간 20조 원이다. 그런데도 이들 공기업의 부채는 458조 원이나 된다. 국가 기간산업이나 민간 부문과의 경쟁이 허용되지 않는 공기업은 보호해야 하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사실상 ‘세금 도둑’이 돼 버린 회사들은 철저히 솎아낼 필요가 있다. 공기업 개혁은 결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고기정 정치부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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