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의 법과 사회]올림픽에 가려진 ‘동북공정’

  • 입력 2008년 8월 12일 03시 01분


중국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베이징 가는 길은 서울에서 홍콩과 톈진을 거쳐야만 했다. 이제 중국의 하늘 문이 열려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

역사적으로 양국관계는 조공과 책봉으로 얼룩졌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다. 장제스를 내치고 천하를 통일한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혈맹관계를 유지해 왔다. 반면에 대한민국과는 적대적 관계였다. 그런데 그 중국이 개혁과 개방의 물결 속에 어느새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돼 간다.

공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제대국으로 치닫는 중국은 ‘인류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통해서 세계 속에 그 위용을 드러낸다. 2008년 8월 8일에 개막된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의 자신감을 전 세계에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자금과 인력을 무제한적으로 퍼부은 개막식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라는 슬로건에 걸맞지 않게 중국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도록 세계의 중심임을 각인시켰다. 논어의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라는 화두는 손님을 맞이하는 동양적 예의범절의 표현이다. 하지만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서양 음악은 중국의 전통악기로 대체되었다. 그들의 4대 발명품과 정화의 원정으로 이어진 공연은 중국적 자긍심의 발로다. 장엄한 향연은 비하적인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다. 수천 명의 군단이 수놓은 화(和)는 서양 중심도 아니고 중국 중심도 아닌 전 인류의 진정한 화합을 기려야 한다.

경색된 한반도의 현주소를 반영하듯 남북이 함께한 한반도기는 사라지고 남과 북은 남남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착시현상인가. 300명이 넘는 대한건아들이 보무도 당당히 입장하는 모습을 비춘 잠시 후, 일순간 누군지를 분간할 수 없는 행렬의 하반신만 스쳐갔다. 혹여 뒤이어 입장하는 초라한 북쪽을 배려한 화면 조작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거대 중국이 세계 속에 그 속살을 드러낸 이때 우리의 대(對)중국 좌표는 무엇인가? 올림픽 성화 봉송 길에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중국 유학생들이 저지른 폭력은 주권국가의 법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이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이곳을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야욕에 불과하다. 인민공화국 기본지도와 교과서에서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찬란한 고구려사를 지워 버린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북단은 중국 영토가 돼 버렸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자행된 외교적 결례도 그냥 지나쳤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미국의 처신에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웬일인지 중국에 대해서는 가급적 은인자중한다. 시민단체들도 더 문제 삼지 않는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정부는 주재국 대사를 소환했다. 미국의 지명위원회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했을 때 촛불집회는 더욱 불꽃을 밝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방한에 맞춘 미국의 입장 변화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이제 다시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중국과 일본을 되돌아본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일본과의 관계는 언제나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그런데 중국과의 관계는 감정보다는 이성적 대응이 주류를 이룬다.

올림픽을 통해서 문명의 중심 국가임을 과시한 중국은 이젠 못살고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초강대국답게 인류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책무를 다짐해야 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넓디넓은 중원 천지에 13억 인구가 공존하는 중국은 지구촌의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이 될지도 모른다. 중원의 안정 속에 펼쳐질 국수적 중화(中華)주의의 발로에 대비해야 할 때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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