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서 광복과 정부수립(건국)은 똑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복이 비록 우리의 자체 역량으로 이룬 것은 아니었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선열들의 줄기찬 독립투쟁이 지속됐고, 우리는 그 법통(法統)을 계승했다. 광복의 토대 위에서 세워진 대한민국이 오늘의 이 빛나는 성취를 이룬 것이다. 오늘날 정부수립을 광복과 떼어놓고 보려는 움직임이 있긴 하나, 이는 명실상부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현대국가를 처음 갖게 됐다는 점에서 정부수립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자는 뜻일 뿐이다. 양자를 결코 나눠서 볼 수 없다. 그런 시도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계속성에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수립의 행로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극심한 이념 갈등 속에서 분열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쪽에서만이라도 유엔 감독하에 총선을 치르고 정부를 수립해 자유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건국 주역들의 공로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들은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後身)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전국 각지에서 획책한 반란과 폭동에 치열하게 맞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공산세력에 정면으로 대항해 정부수립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것이다.
좌파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지금도 “남한이 미(美) 군정의 비호 아래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고착시켰다”는 논리로 대한민국 건국세력에 민족 분열의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 이후 공개된 일련의 비밀문서를 보면 스탈린이 먼저 북에 단독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 단독정권을 수립한 후 남로당 세력을 동원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 자행한 무력도발이 바로 6·25전쟁이다.
건국 주역들의 선택이 옳았음은 오늘의 북한이 여실히 보여준다. 북한도 다음 달 9일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60주년을 맞지만 주민은 절대 빈곤에 허덕이고, 인권은 세계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있다. 북한은 광복과 함께 중국 소련 같은 폐쇄적인 대륙문명권에 편입됐다. 1991년 소련은 붕괴했고, 중국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기 전까지 가난에 찌든 폐쇄국가였다. 당시 우리가 북한과 같은 길을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보는 것만도 끔찍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자유 민주’ ‘시장경제’ ‘법치주의’ ‘국제협력’이었고 이는 9차례 헌법이 개정되는 동안에도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흔들림 없이 계승됐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개방, 상호 교류, 국제협력으로 특징되는 해양문명권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자유와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다.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는 미국과 유엔의 힘을 빌렸다. 오늘도 우리는 개방과 국제협력의 기조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야 한다.
이처럼 정부수립 60년사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성공의 서사시다. 전쟁과 독재를 겪으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큰 흐름에서 보면 가난과 절망을 풍요와 희망으로 대치해나간 도정(道程)이다. 우리는 괄목할 만한 국력 성장을 바탕으로 일본 도쿄에 24년 늦었지만 베이징보다는 20년 앞선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건국의 자긍심을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과 열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선진화가 해답이다. 국가의 선진화, 국민의 선진화, 의식과 문화의 선진화만이 건국의 주역들이 꿈꾸었던 평화와 번영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이다. 국민 모두가 정치적으로 암울했고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시 뛰자. 이명박 정부부터 ‘한강의 기적’을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 정권 10년 동안 이념 과잉의 반작용으로 ‘실용(實用)’이 새로운 국정의 가치처럼 됐지만 실용을 통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분명한 청사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북문제를 비롯한 대(對)4강 외교에서부터 국민이 안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북정책의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운용은 유연하게 해야 하며, 한미동맹을 심화 발전시켜 나가되 주변국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급한 것은 경제다. 1인당 국민소득이 선진국이 되는 기준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가 지난해 2만 달러가 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선진국 지표로 꼽히는 3만 달러가 되는 데 다시 이처럼 긴 시간이 걸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세계화의 파고를 넘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뭘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할지 국민이 믿을 만한 전략과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기업의 체질 개선과 생산성 향상도 중요하지만, 노동조합도 기업 경쟁력에 타격을 입히는 투쟁 중심의 노선을 버리고 협력적인 노사관계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상생(相生)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 사회적인 도전 정신의 회복과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87년 체제와 함께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룩됐으나 민주주의의 콘텐츠는 질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 해방공간에 비견될 정도로 이념의 대결이 심해 선진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민통합의 노력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성적 논의와 적법 절차보다는 ‘떼법’으로 집단이기주의를 관철시키려는 풍조가 팽배하다. 법의식과 사회계약의 미비로 시위문화는 20년 전에서 거의 개선된 것이 없음이 광우병 파동을 통해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이번 8·15를 계기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고 하니 기대해 보려 한다. ‘발전’과 ‘통합’이란 이 정부의 국정지표가 구현될 수 있도록 치밀한 전략과 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건국 60주년에 우리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은 결코 순탄치 않다. 우리가 세계사의 대세에 역류하는 세력에 뒷다리를 잡혀 있노라면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무대의 뒷전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광복 63년, 정부수립 60년을 맞아 각계 지도층과 국민 모두가 건국이념을 마음의 좌표로 삼고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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