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앞 골목 역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면 서운할 게다. 지나기에 불편하고 다니기에 번잡하다고 생각되던 곳들이 공원 같은 거리나 공연장 같은 가로로 변신한 사례는 이 밖에도 더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디자인 서울’을 기치로 내건 서울시 당국의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명품 거리’ 조성에 앞장서고 있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도시의 매력은 거리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한 도시 전체의 대표 이미지가 거대한 랜드마크 건축물에서 점차 일상적 가로공간으로 바뀌어 나가는 요즈음의 세계적 추세와 보조를 같이 한다.
도시의 거리 정경이 이국적으로 보이는 요인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건물 밖에까지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손님을 맞는 이른바 노천카페의 성업이다. 한편으로 이는 소득수준의 향상에 따른 서구식 생활양식의 확산인가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 온난화 현상에 적응하려는 생활방식의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인가 싶기도 하다. 그 어느 쪽이든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침이나 대낮부터 실내가 아닌 바깥에서 차나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행위가 남우세스러운 일에서 예사로운 일로 변하고 있다.
노천카페에 숨은 문화코드
이러한 길거리 식음(食飮)은 한국의 문화적 전통에 비춰 익숙한 광경이거나 점잖은 풍속이 결코 아니다. 그것이 널리 성행한 곳은 유럽이었다. 거기서는 일찍이 고대 및 중세를 거치며 광장과 거리를 중심으로 한 ‘노상(路上)문화’가 발전하였고, 특히 근대사회 초입 민주주의의 태동과 시민사회의 성장과정에서는 도시 가로변의 커피하우스나 살롱 등이 사회적 공론장 기능을 톡톡히 담당했다. 지금도 프랑스 파리나 오스트리아 빈 같은 유럽 주요 도시의 명품 거리는 유서 깊은 옥외 카페 몇 개쯤을 반드시 자랑한다.
이렇듯 노변(路邊)카페는 본디 공적 공간의 성격을 일정 부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색과 독서 및 토론을 통해 사적 개인이 이성적 공중(公衆)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고, 알거나 몰랐던 사람들끼리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공동체적 연대가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도시이론가이자 도시운동가였던 제인 제이콥스가 1950, 60년대 무렵 뉴욕을 위시한 미국 대도시들의 자동차 위주 도시계획을 강력히 비판한 것도 발상은 비슷하다. 그는 이웃과의 소통을 활성화하고 사회적 자본을 증진시킬 수 있는 인본주의적 가로공간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노상사회로의 외견상 진전에 비해 그것의 제도적 기반 및 문화적 토대가 적잖이 부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우선 노천카페들은 많은 경우 영리적 목적 아래 건물이 가로를 불법 혹은 무단 점유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건물주와 공공기관 사이에 이른바 건축선 후퇴 공간(set-back)이나 공개공지(公開空地)와 같은 사유지 내 공적 공간의 사용 문제를 놓고 갈등이나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리의 경관적 가치를 제고하면서 가로의 공익성도 함께 신장하고자 한다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건물의 가로 점유화 추세에 대해 좀 더 합리적이고도 적극적인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공익성-격조 함께 높였으면
이와 함께 노상사회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시민적 성숙과 문화적 격조도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멋있는 외관이나 맛있는 커피, 질 좋은 와인이나 적당한 가격 따위가 결코 필수 조건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닫힌 실내공간이 아닌 열린 공공장소에서 각별히 요구되는 생활 태도와 행동 규범에 새로 익숙해지는 일이다. 주체적 개인의 확립과 보여지는 자아에 대한 성찰, 삶에 대한 여유로운 자세와 타인을 향한 넉넉한 관용,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성의 의미에 관한 사회적 합의와 존중이 없다면 노상문화 시대에 거는 색다른 기대는 차라리 접는 편이 낫다. 명품 거리는 오직 품격시민이 만든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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