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소비자 희생으로 업계 살찌우기

  • 입력 2008년 8월 28일 02시 57분


요 근래 펀드로 재미 봤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고 나면 오르는 펀드 수익률에 취해 재산을 불려줄 ‘요술방망이’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득한 추억이 됐다. 이제는 손실을 감수하고 환매하자니 잃은 돈이 아깝고, 그대로 갖고 있자니 속이 쓰린 애물단지다.

그래도 펀드로 돈을 버는 곳이 있다. 펀드 판매사인 은행과 증권사는 올 상반기에 펀드를 팔아 1조2000억 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판매사는 고객이 펀드에 들면 가입 기간이 몇 년이든 판매보수를 꼬박꼬박 챙긴다. 주식형 펀드의 판매보수율이 평균 1.6% 수준이니 1000만 원을 펀드에 넣으면 돈을 벌든 잃든 연간 16만 원을 내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판매사가 이 돈에 합당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는 의문이다.

투자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금융당국은 작년 7월 ‘펀드 판매보수 합리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1년 가까운 검토 끝에 내놓은 대책은 고객이 펀드를 선택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판매보수율을 자산운용협회 홈페이지에 비교 공시한다는 정도다. 금융 선진국인 영국에는 판매보수가 없고, 미국은 투자자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폐지를 검토하는 제도가 한국에선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주가 하락과 경기 침체로 영업 환경이 나빠진 금융업계로선 ‘마르지 않는 돈줄’인 펀드 판매보수가 폐지되거나 줄어들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해당 업종의 이해를 대변하는 협회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각종 수수료의 정당성을 강변한다. 금융위원회도 전체 금융시장의 안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에 기울어지기 십상이다. 금융 소비자의 복지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이유다.

정부 여당이 얼어붙은 건설 경기를 살리고 꽉 막힌 부동산 거래의 숨통을 틔우겠다며 발표한 ‘8·21 부동산 시장 활성화 대책’이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부동산 소비자의 요구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건설업계의 하소연을 열심히 경청한 흔적은 재건축 규제 완화, 신도시 조성, 수도권 신규주택 전매제한 완화 같은 장황한 리스트에서도 묻어난다.

한계상황에 이른 몇몇 건설업체는 여전히 볼멘 표정이지만 ‘급한 불은 껐다’며 내심 안도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부동산 실수요자들이 간절히 바라던 세제와 금융 관련 핵심 규제는 부작용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대책에서 빠졌다. 시장은 또 다른 대책이 나올 것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지루한 관망을 계속할 태세다.

지방의 미분양 아파트를 정부가 사주게 되면 비싼 분양가를 내고 아파트를 장만한 소비자들은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대규모 미분양 사태의 주범(主犯)은 지난 몇 년간 부동산 호황을 틈타 분양가를 부풀린 건설업체들이라는 문제의식이 건설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현실론에 밀려 슬그머니 실종됐다.

머리 좋은 엘리트 관료들이 의욕적으로 마련한 정책이 번번이 시장과 헛도는 것은 관련 업계를 시장의 전부인 양 여기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논리로 무장해 조직적으로 주장을 펴는 이익단체의 아우성 틈에서 개별 소비자의 목소리는 묻히기 쉽다. 현안이 생기면 우선 업계 단체에 연락해 애로 사항을 취합한 뒤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는 소비자의 희생 위에서 업계를 살찌울 뿐이다. 좋은 민생 대책은 눈높이를 민생에 맞출 때 나올 수 있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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