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이야기의 기획부터 창작과 마케팅, 유통의 전 과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20년 전만 해도 작가는 이야기만 짓고, 기획과 마케팅 그리고 유통은 출판사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21세기 이야기 산업을 주도할 작가는 이야기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이야기의 일생을 한눈에 꿰고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꼭 종이책에 얹힐 필요는 없다. 때로 이야기는 인터넷 게시판을 떠돌고 영화관과 텔레비전을 기웃거리다가 테마 파크에 들러 잠시 쉰다. 이야기의 구성 요소도 각각 나뉘어 대중과 만난다. 인형에서부터 아바타까지 변신한 등장인물이 입고 먹고 마신 것이 상품으로 탈바꿈한다.
기획-창작-유통까지 한눈에 꿰야
이야기의 변화무쌍함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주로 상업적 측면에 치우쳤다. 원소스 멀티유즈란 용어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마케팅의 방편으로 간주됐다. 스토리 디자이너는 이야기를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게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적인 예술학적 관점 외에 사회학 역사학 경영학 공학, 나아가 의학적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연구해야 한다.
대표적인 스토리 디자이너로 영화감독 장이머우를 꼽고 싶다. 몇몇 귀담아들을 비판을 수용한다 해도 그가 연출한 올림픽 개회식은 전통에 근거한 이야기 소재가 디지털 기술과 만난 대표적인 사례다.
거대한 퍼포먼스를 준비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일련의 작업이 눈에 선하다. 아이디어를 모아 정리하고 배치하는 작업부터, 아이디어를 구현할 기술을 하나하나 찾아 적용하는 작업, 거기에 투입할 막대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나누는 작업, 수많은 참가자에게 책임감을 불어넣으며 훈련시키는 작업이 이뤄졌고 그 정점에 장이머우가 있었다.
다양한 작업이 모일 때는 소통이 핵심이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특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망을 하나로 엮어 가공할 아름다움이 뿜어 나오도록 만든 스토리 디자이너, 그가 바로 장이머우다.
영화감독 리안의 행보도 흥미롭다. 그는 동양의 감독이 지극히 동양적인 문제를 들고 서양으로 진출하던 관행을 깨뜨렸다. 리안은 문명의 핵심적인 사건을 단숨에 다룬다. ‘와호장룡’에서 손가락 끝도 닿을 듯 닿지 않는 무협 남녀의 사랑을 그리다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는 미국 남부 카우보이의 처절한 동성애를 담았고 다음엔 치명적인 ‘색, 계’로 껑충 옮겼다.
리안이 영화를 잘 찍기도 하지만 개구리처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튀는 그의 발걸음이 신나고 놀랍다. 그것은 기획의 힘이다. 왜 지금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자답한 성찰의 결과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고 높은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머무르며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표절하며 궁상떠는 겁 많은 이야기꾼에 비해 그의 도약은 얼마나 정직하고 눈부시고 용감한가. 가장 큰 보폭으로 문명과 문명 사이를 오가는 스토리 디자이너, 그가 바로 리안이다.
경계 넘나드는 열린자세 가지길
문제는 자세다. 나와 전혀 다른 배경과 인생관을 지닌 이를 물리치지 않고 보듬는 자세, 낯선 문명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 참혹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해답을 찾아 물고 늘어지는 자세. 스토리 디자이너의 자세가 바르면 그와 협력하는 모든 이의 자세가 바르고 이야기도 멋지고 힘차다.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화려한 테크닉도 한낮 손재주에 머무른다.
스토리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이여! 컴퓨터 자판부터 두드리지 말고 성찰하고 대화하라.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수많은 방향에서 놓고 엎고 뒤엎으며 질문하라. 이것이 가장 바른 자세인가. 여기가 절벽의 끝인가.
김탁환 소설가·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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