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잘해보려고 자료를 모으지만 도움이 안 된다. 서점에 보고서부터 시작(詩作)법 등 글쓰기에 관한 책이 널려 있다는 게 역설적으로 답이 없다는 거다.
글쓰기는 말하기와 함께 소통의 수단이다. 육하원칙은 기사 쓰기의 기본이자, 의사소통의 기본이다. 소통을 잘하려면 자기 의사를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상대의 의사를 간명하게 정리해 받아들여야 한다.
조지 오웰은 ‘정치와 산문’이라는 글에서 “멀쩡하고 구체적인 어휘를 놔두고 애매하고 완곡한 표현이 득세하면 진리와 정의도 사라진다”고 했다. 글이 애매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세상의 기본이다.
김용택 시인은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책에서 작가가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온갖) 책을 읽기 시작한 지 8년쯤 되었을까. 드디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온갖 장르의 글들이 다 써졌다. 생각들은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나 생각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많은 내 생각들을 잘 간수하기 위해서 나는 그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글이 되었던 것이다.”
글을 잘 쓰려면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이라고 했다. 많이 읽고 많이 헤아리고 많이 쓰라는 것이다. 좋은 글을 읽으면 좋은 생각이 샘솟고, 그를 정리하다 보면 문장이 된다.
김 시인의 ‘8년 단련’(독서)처럼 작가들은 글쓰기의 훈련과 규율을 강조한다.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작가의 일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작가라는 직업은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며 “난센스처럼 보이는 군대의 규율처럼, 글을 쓰는 데도 난센스 같은 의식과 습관이 나를 종이에 복종하게 만들고 글에 존경을 표하게 한다. 규율에 의해 길들고 떠밀리고 훈련당하면서 작가는 탄생한다”고 했다. 소설가 김훈 씨도 인터뷰에서 “글쓰기에 잔혹한 훈련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메달을 위해 근육이 찢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훈련을 견디는 것과, 작가들이 글을 남기기 위해 내면의 고통이 따르는 지적 감성적 단련을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신문 기자들도 훈련을 받는다. 출고한 기사가 데스크 과정에서 뼈대만 남는 경우도 있다. 필자도 그런 훈련을 거쳤지만, 아직도 글쓰기가 마냥 즐겁진 않다. 부족한 앎을 메우겠다고 서점에 갔다가 ‘읽을 건 많고 머리는 나쁘다’며 이 책 저 책 뒤지다가 온다.
기자에게 일상인 글쓰기를 새삼 내세우는 이유를 이제 말해야겠다. 인터넷에서 글쓰기를 함부로 대하는 글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티가 없는 ‘막글’들이 인터넷 매체를 타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런 막글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고함이다. 익명에 숨어 상대를 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외친다. 이런 글을 쓴 이들에게 연암 박지원의 가르침을 전하고 싶다. “(거세당한 아픔과 수치를 딛고)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생각해보라.”(소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에서 인용)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