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권순택]‘열혈 국민’

  • 입력 2008년 8월 30일 02시 53분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시위꾼들이 경찰에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이들은 경찰이 본격 진압을 시작하기 전에 슬며시 사라지고 다음 시위에 또 나타나곤 했다. 일부는 경찰을 향해 새총으로 쇠구슬을 쏘았다. 9일 서울 명동성당 근처 시위 때 이들은 염산이 들어 있는 드링크제 병을 경찰에 던졌다. 화상을 입히고 실명을 부를 수 있을 농도의 염산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김모(45) 씨 등 6명은 대부분 무직자와 노숙인이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나 알게 됐다는 이들은 6월 ‘열혈 국민’이란 조직을 만들어 회장 고문 참모 대변인 등 감투를 나눠 썼다. 공갈 사기 폭력 등 전과도 있는 이들은 경찰 수사에 대비해 서로를 ‘개념 없는 놈’ ‘신월동 헬멧’ 등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에 검거되면 ‘한나라당이나 뉴라이트 쪽에서 돈을 주며 폭력 시위를 조장해 달라고 했다’고 진술하기로 사전에 입까지 맞췄다. ‘교활한 바보들’이다.

▷경찰은 이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폭력 시위를 벌였으며 ‘세상과 가진 자들에 대해 화가 나 시위에 나왔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프랑스에서는 노조나 학생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 불만 세력을 ‘파괴자’라는 의미의 ‘카쇠르(casseur)’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불행을 모두 정부나 사회 탓으로 돌린다.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 국가와 허술한 사회안전망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자기 책임’이 완전히 면탈되는 것은 아니다.

▷‘열혈 국민’은 “강경파인데 활동비를 도와 달라”며 시위 참가자들에게서 받은 돈으로 시위 용품과 밥값을 해결했다. 일부 촛불 시위 참가자는 이들에게 ‘수고한다’면서 밥과 술, 담배를 사주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활개 칠 공간을 만들어주고 뒤로 빠져 요즘은 조계사에 숨어 지내는 ‘광우병 대책회의’ 주동자들이 더 문제다. 한나라당은 시위 현장에서 복면을 착용하면 처벌하도록 집시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건전한 평화 시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검토해 볼 만하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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