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신용목]올림픽의 감동, 벌써 그립다

  • 입력 2008년 8월 30일 02시 53분


모든 게 시시해졌다. 소문난 영화도, 좋다는 경치도 심드렁할 뿐이다. 만사 감동이 사라졌다. 몰아치는 태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콕콕 찌르는 절실함 정도는 있어야 용서할 만할 터인데, 삶이 도무지 빈 쳇바퀴다. 돌려도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처음엔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했고 나중엔 취향이 바뀐 거라 여겼다. 자연의 장엄조차 마음을 건드리지 못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다음 순서는, 불감증에 대한 때 이른 자학뿐이다. 형광등이 빛을 발하는 게 아니라 다만 방 안에 숨은 빛을 깨운다면 분명 영화나 경관의 문제는 아니다. 캄캄한 내 속에 도사리던 빛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최근 내 마음의 내시경이다. 물차 지나간 아스팔트 같다.

꼭 서글픈 일만은 아니다. 매번 졸렬한 동일화에 쉬이 날뛰었던 것과 달리, 저절로 대상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다. 돌을 던져도 퐁당, 꽃을 던져도 찰팍, 세상과 나 사이에 강 하나가 가로놓였다. 밍기적밍기적 멱이나 감고 나와 불구경이다.

그러면 저기 먼발치 푸른 지붕의 권력놀음과 고향 사람의 돈 놀음, 주변을 빙빙 도는 무리의 모양 하며, 거기 들지 못해 안달 난 변방까지 무성영화처럼 돌아간다.

불안을 무기 삼는 공무의 사욕화를 비꼬는 일도, 최전선 최전방이 된 물질의 이기를 토로하는 일도 지금 나에겐 개그 품평 이상이 될 수 없다. 하여 이 꼴 저 꼴 너머 어디 통렬히 귀순이나 꿈꾸던 참인데, 마침 백신 한 방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운동은 보기보다 하는 것이 좋다는 게 평소 지론이지만, 하루 종일 리모컨을 붙들고 관전한 올림픽은 내 자신 뛰는 것 못지않은 신명을 줬다. 1초를 졸이는 승부와 쨍한 뒷이야기는 여름 한철을 들뜨게 했다. 사람 모이면 말 많기 예사라고 어느새 베이징의 편린과 촌극까지 습득하고는 시시덕거리는 게 아닌가.

그러나 무상해라. 이제 그마저도 1주일 전 과거사이고 창을 여니 훅, 가을이다. 다시 시시한 사건이 세상의 권태를 입고 장면 속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더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한 굴레가, 실은 올림픽도 시시한 일개 사건이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게 아닌가.

물론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루지야의 총성과 기륭전자 비정규직의 절규, 또는 전국을 달구던 미국산 쇠고기나 공천 청탁 문제가 그대로 침전된 것이 이유의 전부이지는 않다. 경기 중에 우리는 선수들이 다져온 고역의 시간까지를 함께 관람한다. 오랜 축적과 지난 인내가 위엄을 만들고 그것으로 완성된 연속적 실체를 품격이라 한다면, 올림픽이 우리를 감동시킨 이유는 정직한 땀이 가진 위엄과 품격 때문일 것이다. 번지르르한 출세와 한바탕의 호들갑이 우리를 사무치게 만들지는 못한다. 어쩌면 내 증상의 원인은 지금 우리가 위엄을 출세와 깡그리 바꾸고, 품격을 호들갑에 넘겼다는 불평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불평마저 시시해지면 ‘짱 박히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은 별 뜨는 시골 평상을 찾아 생각한다. 올림픽의 쾌거는 모두의 경사이니 함께 춤출 만하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을 타고 연예인이나 대통령까지 얼굴 잡이로 둘러싸고 소란 떨기 전에, 외롭지만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그들 선배와의 대동제를 열어주면 어떠했을까.

밝은 별 하나를 보고 우후죽순 별이 몰려든다면 우주의 질서는 깨지고 마침내 파괴된다.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제 빛을 감당하며 궤도를 도는 것. 그것이 우주의 위엄과 품격이다. 그곳 어디쯤 귀순 가서 위엄과 품격의 사무침에 대해 강연이라도 하고 싶다. 별들이 참 사무치게 떴다 생각하자니, 또한 첫 금메달을 딱지치기한 유도 선수의 고향집이 지척이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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