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은 도쿄의 미군사령부에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와 마주 앉았다. 6·25전쟁과 함께 미소(美蘇) 냉전이 깊어가던 때여서 미국이 주요 동맹국인 한일(韓日) 간의 화해를 위해 만든 자리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요시다 총리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지요.” 이 대통령이 대답했다. “없소, 일본 사람들이 다 잡아가버렸소.” 요시다 총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잘 알려진 얘기를 떠올린 것은 하나의 일화(逸話)와 이에 대한 기억이 국가관계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재치 있는 답변 속에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집약돼 있다. 피해의식에 더하여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묻어난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도 통쾌하다. 당황했을 요시다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앞으로도 이런 기개(氣槪)로 일본과 맞서리라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요시다 바보’라는 제목을 달았다던가. 하고많은 화제 중에 하필이면 호랑이 얘기를 꺼냈느냐는 힐난이었을 터이다.
하나의 에피소드, 그리고 섬광 같은 기억은 크고 복잡한 사건보다 더 선명한 자국을 우리의 역사인식에 남긴다. 그러기에 기억은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된다. 국가관계란 양극체제나 다극체제처럼 체제의 극성(極性)이나, 상호의존성에 의해서만이 좌우되는 게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역사와 기억, 집단적 신념과 사회적 행태, 담론 등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구성주의(構成主義) 이론인데, 유감스럽게도 한일관계가 대표적인 사례연구의 대상이다.
독도, 가필할 點이 아니다
어떤 나라든 영토나 교역문제 등에서 상대국보다 우위에 서려면 ‘안 좋은 기억’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한 국가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과 달라서 수백만, 수천만이 공유하는 집단기억이다. 한번 상(像)이 맺히면 지우기가 어렵다. 정부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이 적지 않겠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내년 상반기부터 사용될 10만 원권 지폐의 대동여지도 그림은 재검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게 될까 두려워서다.
한국은행은 연초 고액권 지폐의 도안을 확정하고 “10만 원권의 앞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초상이, 뒷면에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들어가게 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대동여지도였다. 진본인 목판본에는 독도가 나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은은 고심 끝에 “필사본에는 독도가 표시돼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독도를 그려 넣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반대 여론이 거셌지만 묵살됐다. 대동여지도는 도안, 곧 ‘디자인’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그 정도 가필(加筆)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 한은의 생각이었다.
무책임하고 안이한 판단이었다. 원본에 조그마한 점 하나를 찍더라도 바꾼 것은 바꾼 것이다. 그려 넣은 점 하나 때문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역사적 실증(實證) 자료들이 하루아침에 진위(眞僞)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 디자인이어서 괜찮다고? 말이 안 된다. 그런 논리라면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서 동해(東海)를 ‘일본해(日本海)’로 표기한 데 대해서도 우리에게 해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빛을 이용한 ‘영상 퍼포먼스’였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앞으로 수십 년간 사용할 새 지폐다. 볼 때마다 가필된 한 점의 독도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는 곤란하다. 내 나라 돈을 내가 사용하면서 기분이 께름칙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지폐를 들고 세계 곳곳에서 쇼핑을 하고, 그 지폐를 보여주며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설명할 건가.
李대통령 우려, 韓銀경위 밝혀야
정부도 7월 하순에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이에 관한 대책회의를 가졌고, 이명박 대통령도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정통한 소식통은 내게 “10만 원권 인쇄가 중단된 것으로 안다”고 귀띔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은이 나서서 경위를 밝혀야 한다. 디자인이니까 문제가 없다는 방침이 여전히 유효한지, 아니면 다른 대안을 모색 중인지 국민에게 소상히 알려야 한다.
앞으로 어느 때든 일본 총리가 우리 대통령에게 “한국의 10만 원권 지폐가 참 마음에 듭니다. 한 장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라고 비아냥거리지 말란 법이 없고 보면 새 지폐에 관한 좋지 않은 기억을 더는 키우지 말았으면 한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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