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젖은 조계사 입구에는 종교편향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들이 즐비했다. ‘눈만 뜨면 종교차별/대통령은 사과하라’는 문구는 언뜻 보기에도 점잖은 축에 속했다. 이명박 정부에 등 돌린 불심이 피부로 느껴졌다. 휴가 기간에 열린 범불교도대회에 6만 명(경찰 추산)이 넘게 모였다는 게 실감이 났다.
대웅전에선 49재 봉행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독경소리를 들으며 경내를 돌아보았다. 대웅전 옆문에 기대선 한 외국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서자 수배자들이 60일째 농성을 하는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천막 입구에는 붉은색 바탕에 ‘촛불이 지킵니다, 촛불이 이깁니다’라고 적힌 천 조각이 붙어 있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치켜든 촛불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시위 초기에 10대 중고교생과 주부까지 몰려 나온 데다 협상 과정에서 정부의 잘못도 일부 드러나면서 한때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까지 치달았다. 결국 대통령의 사과와 정부의 추가협상이 이뤄졌다. 그런데도 불길은 3개월 넘게 타올랐다.
그러나 깃발부대가 전면에 나서면서 시위대의 수는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소수화한 시위대는 더욱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했고 그럴수록 시민들은 등을 돌렸다. 시위를 촉발시킨 MBC PD수첩의 보도가 왜곡 과장 보도로 밝혀지면서 촛불의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갔다. 8월 들어 휴가철에 올림픽 열기까지 겹치면서 촛불은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촛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적인 제의(祭儀)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고결, 경건, 순수, 사랑, 헌신과 같이 맑고 숭고하며 깨끗한 이미지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은 애초부터 폭력이나 거짓과 함께 오래갈 수는 없는 법이다. 아고라를 점령해 폭력시위를 선동한 일부 누리꾼만 이런 엄연한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가수 조용필 씨의 ‘촛불’을 처음 들은 때는 대학을 다니던 1980년 늦여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그해 짧았던 ‘서울의 봄’이 남긴 날카로운 기억과 함께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수배자들이 두 달째 기거하고 있는 농성 천막을 보며 문득 이 노래가 떠오른 건 무슨 까닭인가.
천막 틈새로 언뜻 한 수배자의 모습이 보였다. ‘인터넷 삼매경’에 빠진 듯 그는 미동도 않은 채 컴퓨터 화면만 골똘히 응시했다. 꺼져버린 오프라인의 촛불은 어쩔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 그 불씨만이라도 살려내 보려는 것일까. 그의 귓전에는 두 달여 전 광화문을 진동하던 시위대의 고함소리가 아직도 환청처럼 울릴는지도 모른다.
조계사를 빠져나와 종로 방향으로 걷는데 가게 처마 밑에서 사복 차림의 경찰 두 명이 비를 긋고 있다. 좀 떨어진 곳에는 경광등을 켠 경찰 순찰차도 보인다. 수배자들의 천막 농성은 언제쯤 끝이 날까. 현 정부에 등 돌린 성난 불심은 쉽게 돌아설 것 같지 않다. 덩달아 수배자들의 천막 농성도 기약 없이 장기화할 것인가.
만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맺힌 것은 풀고 맞이해야 할 민족의 명절 한가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최영훈 사회부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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