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정부가 제법 큰 규모의 감세안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갑론을박과 정당 간 찬반 대립이 뒤따르고 있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논쟁의 핵심이 분명하지 않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논리적 연관성이 너무 우회적이다. 당장 투자가 크게 늘 것 같지도 않다. 야당은 부자나 대기업을 위한 조치라고 비판하지만 어차피 광범위한 감세를 하면 평소에 세금을 많이 내던 계층의 혜택이 클 수밖에 없다. 소득분배는 세금보다는 경제 자체의 성과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부자 세금 깎아줘도 좋으니 제발 경제나 제대로 살려 놓으라는 서민이 대다수일 것이다.
정부개혁 부진 땐 차선책 찾아야
재정 건전성도 생각만큼 큰 문제가 아니다. 단기적인 적자압력이 생기겠지만 이것이 오히려 관료주의에 젖은 정부에 약이 될 수 있다. 나는 우리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한번쯤 세금을 왕창 줄여 정부 살림을 쪼들리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감세정책의 의의를 넓게는 정부효율, 좁게는 재정규율에서 찾는다는 얘기다.
외환위기를 겪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찾아 헤매는 것은 그동안 정부 개혁이 부진했던 탓이 크다. 기업도 금융도 노동자도 달라졌는데 정부만 옛날 모습이다. 생색내는 수준의 공기업 개혁이나 정부조직 개편으로 정부 체질이 달라질 수 없다. 비록 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정부의 돈줄을 확 조여 놓는 것이 현 시점에서 최상의 선택일 수 있다.
별로 보수적인 학자도 아닌 내가 이런 처방을 내리는 이유는 정부효율 문제가 이념 공방 차원을 벗어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에서는 정부 크기가 이념과 결부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정부의 적정 크기는 정부 서비스의 사회적 편익과 비용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세금 대비 정부 성과가 낮은 경우 정부 크기를 줄이는 편이 바람직하다. 진보 진영이 감세에 찬성하는 경우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최종 선택은 납세자의 몫이다. 1980년대에 미국 유권자가 작은 정부를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택한 것은 대다수가 보수화되어서가 아니라 정부효율에 대한 집합적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작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압승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 서민은 일자리를 포함한 더 큰 복지를 원했지만 정부가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봉급생활자이며 공제 받을 가족이 넷이나 되고, 10년 넘게 같은 집에서 사는 나로서는 이번 소득세, 양도세 인하 방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가 낸 세금만큼 정부 혜택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의 처지에서는 지금보다 더 작은 정부로 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본다. 불가피하게 늘어날 복지지출 때문이다. 불요불급한 정부지출을 줄여 재원부족에 대응하면 좋겠지만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결국 지금 대규모 감세를 해도 언젠가는 어느 정도 증세를 하게 될 것이다.
과감한 감세로 정부효율 높이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과감한 감세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부효율을 높이고 경제 성장을 촉진할 매우 효과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정부 스스로 개혁하면 최선이겠지만 그게 힘들기 때문에 이런 차선을 제안하는 것이다. 돈이 모자라면 일단 아껴 쓸 것이고 그래도 모자라 납세자에게 다시 손을 벌릴 땐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한시적으로 부가가치세를 인하하겠다는 민주당 감세안도 반대하지 않는다. 세금을 다시 올릴 때의 정치적 부담이 매우 크겠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대안이 가치 있다. 여당과 야당이 웃으며 감세 경쟁을 벌이는 환상적인 가을 국회를 기대한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