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그 많던 ‘트로트 신동’… 다 어디로 갔을까

  • 입력 2008년 9월 12일 02시 44분


○ ‘국민가수’ 꿈꾸며 강훈… 반짝하다 사라지기도

“할머니가 아팠어요. 기쁘게 해드리려고 트로트를 불렀죠. 지금은 많은 어른들이 제 노래를 듣고 좋아하세요. 너무 즐거워요.”

친구들과 놀고 싶다. 하굣길 떡볶이 집에도 들러야 할 것 같다. 참아야 된다고 했다. 일곱 살 꼬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바로 ‘국민 가수’. 앙칼지게 “장윤정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이 꼬마는 전남 완도의 트로트 신동 김바다(7·서울 창서초 1) 양이다.

4세 때부터 인형 대신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는 김 양은 완도 문화축제나 지방 행사가 있는 날이면 단골손님으로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KBS1 ‘아침마당’의 ‘토요 노래자랑’에 선장인 외할아버지와 함께 출연해 노래를 불러 3연승이나 했다. 올해 5월에는 경기 의왕시에서 열렸던 ‘전국 어린이 트로트 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았고, 지난주에는 추석 특집 SBS ‘내가 진짜 스타’에 출연해 김혜연의 ‘참아주세요’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김 양은 현재 서울로 올라와 유학 중이다. 진정한 트로트 가수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오전 수업을 마친 후 매일 영어, 피아노, 댄스학원을 들른다. 저녁에는 노래 연습과 학원에서 배운 춤 복습까지 하며 오후 11시가 돼야 잔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사는 김 양의 한 달 평균 학원비는 150만 원. 김 양 뒷바라지를 하는 외할머니 이금자(54) 씨도 처음엔 애들 재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트로트 가수로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완도 집까지 팔았다. 이 씨는 “이제 동네 어른들의 눈요깃거리 신동의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했다.

○ ‘한류’를 넘보는 트로트 소년들

지난해 1집 앨범 ‘나의 아리랑’을 발표한 양지원(14) 군은 현재 일본에 머물고 있다. 내년 2월 엔카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작년 10월부터 도쿄(東京)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지난달 27일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합격 통지서를 받은 양 군의 1차 목표는 12월에 있는 ‘일본어 능력시험’ 1급 통과. 오전 8시 잠을 깨 저녁까지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여기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엔카 발성 연습을 한다.

일본의 신세대 트로트 가수 히카와 기요시를 롤 모델로 삼으며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는 양 군에겐 또래 친구들처럼 사춘기를 겪을 시간조차 없다. 빡빡한 스케줄을 타지에서 감내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 4년간 4000회 이상의 지방행사를 돌며 “트로트로 성공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양 군은 “일본과 미국을 넘나드는 성인가요 전문 가수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추석, 설날 등 명절만 되면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오는 이들. 하지만 한번 트로트 신동으로 주목받은 뒤 이를 지켜내기 위해 이들은 생각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

대구 출신 트로트 신동 김용빈(16) 군도 7개월 전 도쿄로 건너갔다. SBS ‘도전 1000곡’ 최연소 우승자, 270회 무료 공연 등으로 화제를 모았던 김 군 역시 목표는 일본 가요계 진출이다.

매일 9시간씩 일본어 공부와 2∼3시간 노래 연습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마냥 꿈에 부풀어 있지만은 않았다. 김 군은 “트로트 신동이 넘쳐나는 시대에 실력 없이는 그저 1회용 가수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 너도 신동 나도 신동…트로트 신동 포화 시대

가요 업계에서 추정하는 만 15세 이하의 트로트 신동 수는 현재 약 200명 수준. 이들의 등용문인 ‘꼬마 트로트 대회’, ‘트로트 신동 경연대회’ 등 한 해 동안 전국에서 열리는 어린이 트로트 노래자랑 대회는 20∼30건 정도다.

특히 ‘남인수 가요제’를 기획하는 ‘남인수 선생 기념사업 중앙회’에서는 5년 전부터 아예 트로트 신동을 육성하기 위해 ‘남인수 꿈나무 발굴 사업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6명의 신동을 배출하기도 했다. 신해성 회장은 “트로트는 후천적 노력보다 선천적 재능이 중시되는 장르이기에 신동을 꾸준히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SBS ‘스타킹’ 같은 일반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트로트 신동 선발이 단골 코너로 떠올랐다. ‘스타킹’의 서혜진 PD는 “예전엔 ‘바이브레이션(떨림)’만 심사했는데 지금은 개인기에, 집안 내력까지 볼 정도로 신동이 많아졌다”고 했다.

손수제작물(UCC) 역시 트로트 신동 데뷔의 지름길이다.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도 쉽게 신동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

‘싸이월드’ 동영상에는 현재 트로트 신동 관련 동영상이 100건 이상이며 이 중 ‘의정부 신동’으로 불리는 김호건(8·경기 의정부시 호원초 2) 군의 ‘땡벌 동영상’은 조회수 2700건을 넘을 정도로 인기다. 올해 5월 열린 의왕시 ‘전국 어린이 트로트 가요제’는 아예 UCC로 참가 신청을 받았다.

이들이 트로트 신동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친다. ①어릴 적 가요를 흥얼거리거나 가사를 기억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가족들이 재능을 발견 ②마을 잔치에서 주민들 앞에서 노래 부르며 신동 소리를 들음 ③전국 규모의 각종 대회에 출전해 가능성을 확인 ④지역 방송 및 지상파 방송 출연 등이다.

신기한 것은 이들에겐 친부모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다는 점이다. 신동들이 부르는 트로트곡 대부분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레퍼토리에서 비롯됐다. 이혼한 부모 대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트로트 신동도 더러 있다.

매니저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처한다. 1950, 60년대 활동했던 여성 듀오 ‘은방울 자매’의 멤버 오숙남(61) 씨는 자신의 손녀딸인 황혜린(12·서울 창림초 5) 양을 트로트 신동으로 키우고 있다. 황 양은 2004년 ‘공룡 발도장’이란 동요 음반을 냈지만 오 씨에게 60여 곡의 트로트를 배우며 트로트 가수로 변신했다.

○ 무대를 떠나는 아이들

하지만 모든 신동이 성공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트로트 신동들이 받는 출연료가 천차만별이다. 데뷔 앨범을 냈거나 방송에 출연해 얼굴이 알려진 ‘A급’의 출연료는 1회에 대략 50만∼150만 원 수준. ‘B급’ 신동이면 10만∼30만 원. 때로는 문화상품권 몇 장 받는 걸로 끝이다.

‘초짜’ 트로트 신동들은 얼굴을 알리기 위해 무일푼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트로트 신동 섭외 전문회사인 ‘굿 피플 기획’의 문성훈 대표는 “한 푼도 못 받는 신인 트로트 신동이 100명 가까이 된다”고 말했다.

‘동해 리틀 트로트 가요제’ 2회 대상 수상자인 박서인(12·강원 고성군 거진초 5) 양은 여전히 동네 무대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박 양의 재능을 뒷받침할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박 양의 어머니 김순덕(46) 씨는 “딸의 재능을 썩히는 것 같아 속 상하다”고 말했다.

트로트 신동으로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사례도 많다. ‘동해 리틀 트로트 가요제’ 1회 대상 수상자인 최경찬(14·거진중 3) 군은 트로트 신동의 꿈을 접고 예술고에 진학해 성악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의왕시 ‘전국 어린이 트로트 가요제’에서 1등을 한 유재덕(12·경기 남양주시 미금초 5) 군도 트로트를 하나의 ‘징검다리’로 삼은 케이스.

유 군은 얼마 전 ‘비’, ‘원더걸스’ 등을 배출한 대형 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의 공개 오디션을 봤다. 그의 아버지 유훈상(45·개인택시) 씨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타나는 트로트 신동들을 보면 곧 중학생이 될 아들이 경쟁력이 있을지 의문”이라며 “계속 대형 기획사 오디션을 보게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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