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여러 번 해외 체류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배달도 안 해주는 나라인 데다 자동차도 없고 택시도 다니지 않는 데서 어떻게 필요한 가구를 사다 나를까 고민하느라 목덜미가 뻣뻣해질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생각하니 당연히 노트북컴퓨터를 올려놓고 일을 할 수 있는 책상과 덮고 잘 이불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책상보다 이불을 먼저 떠올렸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다음 날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내 ‘한국어센터’의 일을 도맡는 스태프에게 운전을 부탁해 ‘이케아’로 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과 방문 학자가 가장 먼저 들른다는 곳이었다. 가구는 값이 싼 대신 스스로 조립해야 했다. 책상과 식탁 대용으로 쓸 만한 커다란 테이블 그리고 의자 두 개, 매트리스와 이불을 샀다.
美학교 아파트 가구 없어 당황
책상과 의자를 조립해 놓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고 밤에는 기내용 담요가 아니라 매트리스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잘 수 있게 됐다. 밤에 말똥말똥 눈을 뜨고 생각하니 사야 할 것이 아직도 너무나 많았다. 수저나 컵, 타월이나 식수 같은 물건도 필요했다. 4개월 체류지만 1년 사는 사람 못지않게 필요한 게 많았다. 하지만 생각뿐, 여기 온 지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그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처음에는 뜻밖이긴 했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는 오전에도 자주 오지 않는 데다 낮 12시가 지나면 배차 간격이 아예 40여 분에 가까워진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두리번거리다 보면 주변에 다닥다닥 붙은-주로 물건을 사고판다는-개인광고지를 보게 된다. 1년에도 수천 명의 학생이 들어오고 나간다는 이 대학 도시에서, 떠나는 사람과 새로 도착한 사람이 가장 사고팔고 싶어 하는 것은 역시 책상과 침대인 것 같다. 그런 벽보는 대개 밑에 붙은 연락처가 동이 나 있다. 꽤 튼튼해 보이는 오크 데스크를 헐값에 판다는 벽보를 보면 연락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한다.
방을 계약하고 나자 오피스 사무원이 가장 먼저 읽어보라고 준 책자가 지진에 관한 내용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지진에 대비해 아파트도 나무로 짓고 유리 같은 자재는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책자에 따르면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밖으로 뛰쳐나가지 말고 튼튼한 가구, 이를테면 책상 밑이나 침대 밑으로 숨으라고 되어 있었다. 이 조립식 책상은 건장한 남자가 주먹으로 한 번 툭 치면 두두둑 부서져버리고 말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 아슬아슬한 책상에서 나는 일기를 쓰거나 집을 떠날 때 가져온, 생명의 여정과 동물의 탄생을 그린 로렌 아이슬리의 아름다운 책 ‘광대한 여행’을 천천히 한 페이지씩 읽곤 한다. 몇 년 전인가 자전소설에도 썼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사람은 부족한 대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인생이라는 광대한 여행. 그 긴 여행에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게 그리 많을까
아직 다른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이렇게 책상에서 글을 쓰고 밤에는 이불을 덮고 잘 수 있다. 방문을 처음 열고 들어왔을 때 느낀 당황스러움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주 많은 것을 갖춘 셈이다. 여길 떠날 때가 되면 나 역시 새로 산 책상과 이불을 처분해야 한다. 그때 예기치 못한 상실감이 든다면 그 사물이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말씀이, 백번 맞는 것 같다.
조경란 소설가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