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권희]납세자를 생각하는 구제금융

  • 입력 2008년 9월 25일 02시 45분


“구제금융 부담을 왜 납세자들이 져야 하나.”(야당 의원)

“납세자들이 궁지에 몰릴까봐 걱정하는가. 납세자들은 이미 그렇게 돼 있다. 적절한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신용위기 여파로 거의 모든 국민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재무부 장관)

미국 정부가 ‘금융위기 허리케인’의 충격을 막기 위해 구제금융을 요청하자 의회에선 그 방식과 예상효과는 물론이고 ‘왜 세금으로 해야 하느냐’를 집중적으로 따져 물었다. 11월 대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의회의 추궁이 더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정부가 바라는 7000억 달러(약 800조 원)의 구제금융은 한국이 외환위기 때 2년 반 동안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받은 195억 달러의 35배나 된다. 미국은 물론이고 국제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23일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서 “구제금융을 신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고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선(先)구제 후(後)추궁”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당인 공화당조차 쉽게 도장을 찍어주지 않을 태세다. 국제기구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국민의 혈세를 써서 구제금융을 줄 수밖에 없겠지만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조건을 걸어놓으려는 것이다.

야당이면서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은 더 까다롭다. 납세자 보호장치가 더 있어야 하고 주택 압류 위기에 처한 주택소유자들도 지원해야 하며 부실채권을 떠넘긴 기업 경영진의 보수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것 등이다. 구제금융이 더뎌질 경우 금융시장 붕괴의 책임을 일부 뒤집어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꼬치꼬치 물고 늘어졌다. 민주당은 정부를 몰아붙였고 공화당까지 “대규모 구제금융 방안은 해결책이 아니며 미국답지 못하다”거나 “다른 대안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고 발표하게 만들었다.

특히 크리스토퍼 도드 금융위원장(민주)이 낸 44쪽의 구제금융법안 수정안이 압권이다. 주택소유자 지원, 독립적인 감독관 임명, 훗날 회수된 구제금융의 납세자 보상 방안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여기에 비하면 재무부가 다급하게 만들어 의회에 내민 석 장짜리 법안은 초라하기만 하다. 미 백악관이 “(정부안은) 몇 달간 논의해 만든 것”이라고 둘러대는 바람에 오히려 정부 실력이 들통 날 것 같다.

도드 위원장의 아이디어는 한국에서도 나오지 않았을까. 한국은 아마 모범사례가 아니라 반면교사였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받아 회생된 금융공기업들이 장사를 잘한 시중은행을 웃도는 급여나 과도한 성과급을 지급해 비난을 사고도 제때 고치지 못하는 걸 본 모양이다. 막대한 부실을 정부에 떠넘기고 구제받을 때는 국민 부담을 미안해하는 척하다가 훗날 기업 이익이 많이 나면 자기들끼리 갈라먹기에 바쁜 한국 대기업 노조의 행태를 전해들은 모양이다.

한국 정부가 또 구제금융법안을 만드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이번에 정부가 단단히 배워둘 게 있다. 미국 의회에서 ‘납세자’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겁고 무섭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점이다. 마침 지난 정부가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운용해온 세제를 정상화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납세자를 무시하는 오만한 정부는 반드시 응징을 당한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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