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늙은 ‘부자’의 슬픔

  • 입력 2008년 11월 17일 02시 49분


청년은 세무공무원 집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수뢰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있으니 해결을 바란다면 급히 현금을 준비해 오라는 내용이다. 약속장소에는 어김없이 돈 보따리를 든 부인이 나타났다. 청년은 이렇게 수금한 상당액을 불우이웃에게 나눠주었다. 꼬리가 길어 잡힌 그가 재판을 받게 되자 다수 수혜자들이 선처를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다. ‘의거’ 장소는 대구였고 이 현대판 의적(義賊)의 이름은 김영철(金永喆)이다.

이런 기사를 1970년대 초 신문에서 보았다. 혹 착오가 있을지 모르지만 큰 줄거리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기억하는 것은 내용이 너무나 통쾌했기 때문이요, 이름까지 기억하는 것은 동명이인 지인이 있기 때문이다. 있는 자의 떳떳하지 못한 돈을 털어서 없는 이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래서 의적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정의로운 영웅으로 살아 있다.

어느 문화에나 의적 전설이 있어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의적 이미지의 구성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치 못한 부자에게서 빼앗아 없는 자에게 나눠준다는 것, 민중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 사회악을 고치려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임꺽정이나 홍길동전에 나오는 활빈당(活貧黨), 영국의 로빈 후드나 러시아 민요에 나오는 스텐카 라진이 모두 의적의 범주에 속하는 원형적 인물이다.

의적 콤플렉스에 걸린 야당

전설이나 실화 속의 의적이 반드시 실상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의적의 이미지는 대중의 꿈을 먹고 자라서 미화된다. 활빈당이 대중의 박수를 받게 되니 선동가나 대중영합주의자들은 곧잘 활빈당 행세를 하게 마련이다. 활빈당의 언사를 쓰고 민중의 벗을 자처하면서 그들을 속이고 오도한다. 그래서 명민하지 못한 대중의 무동을 타고 기고만장한다.

노무현 정권은 활빈당을 역할 모형으로 삼고 걸핏하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어 민중의 벗을 자처했다. 그러나 노 정권 아래서 빈부 격차가 늘어나고 가난한 다수의 생활이 악화되었음은 통계수치가 말해주고 있다. 약자의 편이라는 정치적 수사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도와준 것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라는 자살률만 하더라도 노 정권 아래서 급증하였다. 그게 부자들의 자살 선호 때문일까?

종합부동산세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 일부 위헌, 일부 헌법불합치란 판결에 대해서 야당 대표는 ‘참 나쁜 판결’이라고 하면서 종부세 감면 법안을 저지하겠다고 말했다. 헌재 구성원의 다수는 노 전 대통령이 지명한 터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기각 결정 이외엔 모두 ‘참 나쁜 판결’이란 말인가? 하기는 스스로 매듭지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조기 비준을 주장하다가 재협상을 주장하는 전직 대통령을 모시는 정당인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버블세븐 지역의 아파트 값이 폭등한 것은 노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 탓이다. 종부세 부과가 다주택 소유자의 매물 쏟아내기를 유도해서 집값이 내릴 것이라는 기대는 허사가 되었다. 남은 것은 전국 가구의 2.4%에 세금 폭탄을 퍼붓고 다수파에 추파를 보내는 속 보이는 행태였다. 과거 식민지 지배의 원칙은 ‘분열시키고 통치하라’는 것이었다. 노 정권은 국내 식민지 정책을 썼고 의적 콤플렉스에 걸린 야당은 죽어라 하고 추종하고 있다.

버블세븐에 살면 모두 투기세력?

인기 없는 아파트의 개척민으로 출발한 ‘1가구 1주택’ 장기보유자 특히 고령자는 참 난감하다. 모든 자산을 포괄하지 않은 주택가격만으로 2.4%의 부자로 강제 귀속돼 눈총을 받는다. 버블세븐에 산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부동산 투기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획일주의적 군사문화의 원숭이 놀음이다. 월 1500만 원의 예우보조금을 수령하고 대지 1200평의 호화주택을 짓고 사는 알부자가 종부세 3만 원을 부과받았다는 현실은 또 어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친구에게 말만 하면 수억 원을 빌릴 수 있는 이들이 부자가 아니고 누가 부자인가. 그들이 명실상부한 ‘정의로운 영웅’이 되려면 자기 재산부터 나눠줘야 할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괴로움’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번역돼 있다. 슬픔이라고 해야만 호소력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분노나 괴로움을 고쳐 ‘늙은 부자의 슬픔’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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