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안종범]예산심의, 살림꾼 안보인다

  • 입력 2008년 11월 22일 02시 59분


정치란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갈등을 풀어주는 최후의 보루이다. 다른 견해와 이해관계로 갈등을 보이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 바로 정치이다. 그런 정치가 우리에게는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는 분야로 인식된다. 대부분 국정 현안을 놓고 좌와 우라는 이념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계급으로 편을 갈라놓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여야, 진정성 없는 인기영합 싸움

감세안을 놓고 ‘부자감세’라면서 논쟁을 유도하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면, 그리고 야당시절 국가채무논쟁을 주도했던 한나라당이 이제는 선진국과 비교해서 국가채무가 아직 적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낮은 우리 정치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이다. 위기는 일단 금융에서 시작됐는데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인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 하락은 20%나 돼 세계 최고 수준이고, 주가 하락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내년부터는 실물부문의 위기가 시작될 것이 분명한데 대외 의존도가 최고 수준인 우리가 겪게 될 실물위기 역시 어느 국가보다 더 심각할 것 같아 여간 걱정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예산안 심의가 시작됐다. 여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첫날부터 싸웠다. 공수만 바뀌었을 뿐 싸움의 양상은 지난해와 똑같다. 진정성 없이 인기영합 싸움만 한다. 언론에 장식될 헤드라인만을 의식한 채 단편적이고도 감각적인 슬로건 경쟁만 치열하다. 어떤 정치인도 최소한의 전문성과 차분함을 갖고 예산을 대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여기에 언론도 한몫을 해서 흥미를 가질 만한 정치인의 말과 행동만을 전달한다.

우리는 건전하게 꾸려간 나라살림 덕분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외환위기 이후 2년 연속 국내총생산(GDP) 대비 4.3%와 2.9%에 이르는 적자재정을 통해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감세안과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도 적자재정은 GDP 대비 2.1% 수준이다. 일단 위기 극복을 위한 또 다른 선제적 대응으로 재정 확대를 시도하려고 한다.

지금 이 같은 선제적 대응이 필요한 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무조건 예산을 늘려서는 안 된다.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어서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니 늘려도 된다는 생각도 곤란하다. 또 중소기업예산 혹은 복지예산이니 위기에 따른 피해계층을 보호한다며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태도로도 안 된다.

이제는 위기에 대처하고 경제를 살리는 데 실효성이 가장 큰 사업을 하나하나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 그래야 비록 적자로 편성했지만 실효성이 담보된 재정 확대라서 경제가 살아나고 또 세수가 더 걷히면서 적자폭이 줄어든다. 예년처럼 예산증가율을 놓고 싸움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서둘러 처리해버리면, 늘 그렇듯이 내년에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은 채 추경을 편성할 수밖에 없다. 추경이 편성되는 순간 지금 그토록 싸우던 증가율이나 적자 규모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실효성 큰 사업 철저히 가려내야

지난해 예산편성 당시 기준으로 삼은 수치가 유가 60달러, 환율 920원, 그리고 성장률 5%이다. 이 지표가 지금 어떤지를 보고 이번에는 달라져야 한다. 예산은 늘 보수적으로 편성하고 심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최악의 상황을 설정해놓고 이에 대비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설정하고서 예산 심의를 해야 한다.

증가율과 같이 겉으로 보이는 요인은 물고 늘어지면서 예산심의 속으로 들어가서는 지역구 예산부터 챙기는 행태를 이번만큼은 안했으면 좋겠다. 지금 예산심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정 확대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우리가 겪을 내년의 위기는 외환위기보다 더 큰 고통으로 국민에게 다가온다. 그러면 지역구 예산 배려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안종범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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