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씨는 잠을 못 자고 헛소리를 하는 심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손가락 신경 상실로 글씨를 못 쓰게 되어 교사의 꿈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던 그로서는 당장 학업을 잇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주위의 도움으로 충격에서 회복돼 겨우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 난 몸과 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범인이 붙잡히긴 했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올해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초등학생 혜진, 예슬 양 납치 살해사건의 충격은 아직도 가족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예슬이 가족은 예슬이와 함께 살던 경기 안양을 버리고 먼 곳으로 이사했다. 부모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잊혀지고 싶어 예슬이 언니의 이름까지 바꿨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 하면 주로 범죄자 또는 범죄 혐의자의 인권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를 감시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 같다. 외국인 근로자, 탈북자, 차별받는 여성들의 인권도 사회적 조명을 받으면서 크게 신장된 게 사실이다.
수사와 재판과정, 교도소에서 범죄자들의 인권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데 비해 범죄 피해자들 중에는 정부와 사회의 무신경으로 평생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대학생 A 씨와 혜진, 예슬 양의 부모 같은 사람들이다. 범죄를 당하지 않은 것만을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다. 누구나 이들처럼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1990년대 이전엔 ‘범죄 피해자의 인권’이란 말조차 생소했다. 1990년대 초 대학교수와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범죄피해자학회’가 출범하면서 비로소 학계 차원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주무부처인 법무부도 뒤늦게 이 문제에 눈떠 2005년에야 범죄피해자보호법을 마련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지만 그래도 올해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19일엔 제1회 한국 범죄 피해자 인권대회가 열려 ‘범죄 피해자 권리 선언’이 채택됐다. 범죄 피해자의 인권 실현을 국가와 사회의 책무로 규정하고 피해자가 형사사법절차에 참여하고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사생활과 신변 안전을 보호받을 권리, 피해보상을 받을 권리를 천명했다. 전국 56개 범죄피해자지원센터도 요즘 부쩍 활기를 띤다.
무엇보다 범죄 피해자와 가족의 아픔을 진정으로 함께 느끼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사회의 인식이 중요하다. 수사과정에서 흉악범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도록 모자와 마스크를 씌우면서도 정작 피해자는 사생활을 마구 들춰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범죄자와 범죄 피해자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인권 보호의 잘못된 등식(等式)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