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안산에서 희망을 보았다

  • 입력 2008년 11월 24일 20시 06분


경기 안산시에 58개국 국민이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거주 외국인 100만 명 시대여서 꽤 많은 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살 걸로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그것도 인구 74만의 소도시에…. 친구가 그곳 대학에서 일해 몇 차례 놀러간 적도 있는데 왜 몰랐을까. 그러면서도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걱정은 혼자 다했으니, 낯 뜨거운 일이다. 현장 한번 살펴보지도 않고 나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건가.

주말인 15일 안산시청으로 차를 몰았다. 박주원(50) 시장부터 만났다. 초선인 그는 민원행정에 ‘24시간 편의점’ 개념을 도입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민원실을 365일, 24시간 열어놓게 함으로써 휴일이나 밤중에도 민원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바람에 일요일에 급히 여권을 만들려고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안산은 반월, 시화산업단지를 끼고 있어서 국내 최대의 외국인 노동자 밀집 지역이다. 등록 외국인은 3만2983명에 이른다. 미등록자까지 포함하면 4만여 명으로 시 인구의 5%나 된다. 국가별로 보면 중국인(조선족 포함)이 가장 많고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몽골 러시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순이다. 수는 적어도 나이지리아 콩고 세네갈인들도 들어와 산다.

다문화 사회, 국가의 자산이다

박 시장의 안내로 단원구 원곡동에 있는 외국인주민센터를 찾았다. 요즘엔 이 센터를 보고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태국 인도네시아 몽골은 물론이고 다문화 가정 대책에 관한 한 선진국인 일본까지도 담당 공무원들을 보낸다고 했다.

올해 3월 문을 열었다는 이 센터는 웬만한 시군의 주민회관과 크기가 비슷했다. 센터의 행정조직은 단순했다. 소장(所長) 아래 다자외무담당, 지구촌문화담당, 국제교육담당, 외국인인권담당 등 4개의 담당(과)으로 짜여 있었다. 그 명칭에서 장차 거주 외국인 200만, 300만 시대에 우리의 행정조직이 어떻게 바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센터엔 진료소, 송금센터, 컴퓨터 교육실, 한국어 교육실, 문화강당, 다문화 도서관, 통역지원센터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쉬고 공부하고 놀 수 있는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2층에 있는 통역센터에 들렀더니 몽골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 파키스탄 태국 중국 한국 등 9개 나라 국기가 통역 의뢰 창구마다 꽂혀 있다.

말이 안 통하면 얼마나 갑갑하고 서러우랴. 한 베트남인 노동자는 한국인 동료들에게 “나를 왕따시키지 말라”고 수없이 말하고 싶었지만 베트남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결국 통역센터의 도움을 받았다고 안내자가 귀띔했다.

나는 궁금했다. 센터 직원은 17명뿐이라는데 어떻게 이처럼 질 좋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답은 관(官) 민(民) 기업(企業) 3자의 거버넌스(governance·협치)에 있었다. 관은 정책과 리더십으로, 민은 자원봉사로, 기업은 재정 후원으로 서로 도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무료 진료만 해도 안산시 의사회, 약사회, 한의사회, 고대안산병원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니 잘될 수밖에. “환자를 잘 본다”고 소문이 나 인근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몰려온다고 한다. 무료 통역에 필요한 콜센터의 운영비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댄다. 이러니 ‘저비용 고효율’의 안산 용광로(melting pot)가 식지 않는 것이다.

물론 숙제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외국인 범죄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면 조직화 흉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불법체류자 문제도 심각했다.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의무교육을 받을 수 없다.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이 성년이 됐을 때 2005년 11월 프랑스 파리 외곽을 뒤흔든 이민자 폭동이 안산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58개국 국민과 함께 사는 안산

다인종, 다민족 사회의 다양성을 경제적, 문화적 자산으로 끌어올리는 일도 급해 보였다. 초기 집단 거주의 단계를 지나 적어도 일본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이나, 대표적 이민자(移民者) 문화상품으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노팅힐 카니발’이나 ‘퀸스 마켓’ 수준까지는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보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5년 한국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노동력을 50년 동안 유지하려면 전체 인구의 35%를 이민자로 채워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피할 수 없는 ‘이민자 사회’, 그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단서를 안산시는 보여주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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