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인숙]더 춥고 더 힘든 이에게

  • 입력 2008년 11월 26일 03시 02분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이었을 어느 해의 연말, 나는 종이상자를 들고 길거리에서 이른바 모금이란 걸 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귀했던 붉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그 옷은 여름 한복이었다. 그때 우리들은 불우이웃돕기 모금을 하는 중이었다.

동네 친구와 형제로 구성된 모금단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에는 연말 불우이웃 돕기가 유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말이면 TV에서는 성금을 내는 사람을 생방송으로 보여줬다. 내가 살던 동네가 방송국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모금통을 들고 부리나케 달려가면 운 좋게 방송에 나오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을 터이다.

짐작하겠지만 예닐곱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여름 한복을 입혀 앵벌이 시키듯 모금을 하는 ‘우리들’이란 게 실은 정작 도움을 받아 마땅할 불우이웃이었다. 그 시절에는 대개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가난했다. 한겨울임에도 연탄광은 비어 있었고, 쌀독을 채우는 일도 난망했다. 늦은 밤마다 시장통에는 상인이 버리고 간 배추 잎이나 생선뼈를 주우러 오는 사람이 보였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든 시절,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먼 소식이 아니라 바로 내 옆집 이야기였다. 눈에 보이는 가난이 그토록 생생하였으므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은 타인에 관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실감이기도 했을 터이다. 물론 아주 오래전, 모두가 가난했던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의 이야기이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는 결식아동의 소식이 전해지거나 난방이 되지 않고 수도가 공급되지 않는 집에서 살아간다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오면 아직도 그런 일이 있을까 놀라게 되는 일이 다반사이다. 가난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냥 추억이 된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온 사회에 따듯하게 되돌려 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간혹 평생을 허드렛일로 살아온 노인이 자신이 번 돈 전부를 사회에 기부했다는 보도를 볼 때가 있다. 그에게도 아마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살면서 그러한 순간이 한 번도 없는, 그토록 운이 좋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노인이 채워준 것은 도움이 필요했던 이웃의 마음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우리 시대의 빈틈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는 게 너무 바빠 채우지 못했던 사회적인 관심, 따듯함, 사람다운 것…. 그리하여 통틀어 어쩌면, 도덕이라 불릴 수 있는 것.

최근에는 20대인 영화배우가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액수를, 그것도 익명으로 기부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그의 고난스러웠던 가계사는 오히려 그에게 베푸는 삶을 가르쳤을 터이다. 그리하여 반성할 틈 없이 달려온 사회는 다시 그 앞에서 부끄럽다.

경기침체가 가속화되면서, 최근 우리는 너나없이 가난해진 듯하다. 텅 빈 통장을 펼칠 때처럼, 때때로 가슴이 더럭더럭 내려앉는다. 통계에 의하면 최근 들어 기부와 자원봉사 참여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면서도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TV 출연이 욕심이었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 어린아이의 종이상자에 의심 없이 푼돈을 넣어준 사람들에 관한 기억이 새삼스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더 춥고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안 춥고 안 힘든 사람이 아니라, 역시 춥고 힘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부끄러운 것은 가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를 일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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