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KUHO브랜드 만든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 씨

  • 입력 2008년 11월 29일 03시 03분


정구호 제일모직 상무는 “옷을 잘 입는 것은 비싼 옷 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패션이 뒤떨어지는 것은 좋은 옷을 안 입어서가 아니라 늘 비슷한 형태의 옷만을 ‘유니폼’처럼 입어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훈석 기자
정구호 제일모직 상무는 “옷을 잘 입는 것은 비싼 옷 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패션이 뒤떨어지는 것은 좋은 옷을 안 입어서가 아니라 늘 비슷한 형태의 옷만을 ‘유니폼’처럼 입어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훈석 기자
“창의성은 모험서 나와… 위험에 대한 두려움 떨쳐라”

《이 기사는 동아비즈니스리뷰(DBR) 22호의 ‘New Wave Spotter’ 인터뷰를 요약해 정리한 것입니다. ‘New Wave Spotter’는 문화, 예술, 사회, 경영 등 각계의 트렌드 리더들이 생각하는 미래 트렌드와 그들의 통찰력 있는 아이디어, 세상과 소비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소개하는 시리즈 기사입니다. 이 코너는 DBR와 KT경영연구소 미래사회연구센터가 함께 제작하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정구호. 그는 대한민국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이 첫손에 꼽는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선망 받는 대기업 임원(제일모직 상무)이다. 미국 휴스턴대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각각 전공한 뒤 그래픽 디자이너, 뉴욕의 한인 식당주, 카페 사장, 인테리어 디자이너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결국 꼭 해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뒤늦게 패션 디자인에 뛰어들어 성공한 엄청나게 운 좋은, 혹은 능력 있는 남자다. 언제부터인가는 영화판에도 뛰어 들어 ‘정사’ ‘스캔들’ ‘텔미썸딩’ 등 유명 작품의 아트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17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제일모직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KUHO)로 잘 알려진 그는 가지런하게 정리된 하얀 치아를 제외하곤 온통 까만 색상 속에 묻혀 있었다.

부드럽게 인터뷰를 시작할 겸해서 그의 패션감각을 언급하며 ‘한국 기업인들의 패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정 씨의 답변은 예상외로 진지했다.

“한국 기업인들의 패션이란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겠죠. 패션이라기보다 그냥 ‘유니폼’ 개념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남성복 패션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이 낙후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패션 거리에서는 남성복 매장이 여성복 매장만큼 눈에 많이 띕니다. 중국의 여성복 시장은 우리의 1980년대 수준에 불과하지만 남성복 시장의 수준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비싼 옷 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양한 옷을 많이 입어 봤느냐, 남과 다른 시도를 해 봤느냐의 문제입니다. 한국의 남성들이 패션을 어색하게 여기는 것은 옷을 많이 안 입어 봤기 때문입니다. 그 어색함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내지 않는 한 한국인, 특히 한국 남자들의 옷차림은 ‘패션’이라는 용어로 불러주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업 구성원들은 몰개성화된 집단 분위기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몰개성화는 단순히 기업인들의 패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창의성 측면에서 우리 기업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시나요.

“창의성 측면에서 국내 기업이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좋은 아이디어나 디자인을 인정해주고, 실제 적용을 승인해 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내 디자인 수준과 해외 디자인 수준이 창의력 자체보다는 핸들링 역량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최근 국내 기업들도 세계적인 유명 디자이너와 작업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과의 작업에서 나온 결과물은 그들의 ‘베스트 작품’과 상당히 많은 차이가 납니다. 저는 그 이유를 작업 과정, 다시 말해 창의성을 관리할 인력의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업의 두 번째 문제점은 위험에 대해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위험 감수(risk-taking)의 과정 속에서 생산되며 안정과 위험 사이에 존재합니다. 창의성은 아직 시장에서 증명되지 않은 것, 증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시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주로 안정성 위주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듯합니다.”

―현업 디자이너들은 기업의 지나친 ‘시어머니 역할’이 창의성을 제한한다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기업과 디자이너는 서로 다른 입장과 시각의 차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요.

“저는 기업 안에서는 창의적 작업도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예술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도 ‘성공을 보장하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기업이 사업화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창의성 있는 예술가라면 기업 경영과 창의성 등 두 가지 언어를 다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도 기업이 꼭 창의성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론적으로 기업이 판매 극대화를 추구한다면 ‘익숙하고 안전한’ 것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새로운 것은 판매를 넘어 기업의 이미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루이비통이 잘 팔릴 것만 매장에 진열한다고 생각하세요? 안 팔릴 것 같은 신제품도 잘 팔릴 만한 것들과 섞어 놓습니다. 이런 것들은 팔리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새롭게 진화하는 기업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기업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역할도 하죠. 또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 궁극적으로 열광하는 것은 새로움이란 사실입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안전한 디자인’보다 결과적으로 판매 신장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플의 ‘아이팟’을 생각해 보세요. 애플에서 아이팟을 처음 만들 때 판매 증진 차원에서만 접근했다면 지금처럼 히트상품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세상과 소비자의 트렌드를 짚어내는 방법과 앞으로의 트렌드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국내외 신진 디자이너들이 펼쳐 내는 창의성과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미래 트렌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들이 지금은 소수이지만 10년 뒤에는 당연히 메이저 그룹이 될 테니까요. 이들이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지를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별 트렌드로는 크게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는 개인화·개성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시될 것이란 점이고, 둘째는 양적인 삶에서 질적인 삶으로 넘어가려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표준화한 대량 생산은 지양해야 합니다. 기업이 매우 세밀한 세분시장(segment) 안에서 최고의 질(質)을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업에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 흐름을 파악해 내는 능력이죠. 그런데 저는 미래로 가는 흐름은 물의 흐름과 꼭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법이 없듯이 미래의 흐름 역시 대중에서 시작해 리더들에게 파급되지 않습니다. 미래 트렌드는 언제나 리더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기업은 다수의 추종자(mass follower)인 일반 대중보다는 각 분야의 트렌드 리더들을 관찰해 미래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한상 KT 미래사회연구센터 선임연구원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