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삼류영화

  • 입력 2008년 12월 2일 02시 51분


1997년 11월 17일 저녁. 나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경기고 강당에 있었다.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후보의 ‘마크 맨’(담당 기자)으로, 이 후보가 참석하는 경기고 동문 행사를 취재 중이었다.

그날 강당에서는 2000년 경기고 개교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동문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행사는 사실상 이 후보의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경기고 49회 졸업생인 이 후보가 입장하자 1000여 명의 동문은 열렬히 ‘이회창’을 연호했다. 동문 출신 연사들은 “경기인들은 뜨거운 가슴이 없어서 역사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 “동문이 하나로 뭉쳐 새 역사를 창조하자”며 이 후보를 당선시키자고 호소했다. ‘이회창 대통령’이라는 연호도 터져 나왔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씁쓸했다. 이 나라 최고의 명문고 출신들마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똘똘 뭉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이전 대선에서 경기고 출신 유력 후보가 없었기도 했지만, 그해 대선에서 경기고 동문들은 유례없이 뭉쳤다. 그러나 결과는 이 후보의 패배.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경기고 출신 기업인들에 대한 세무조사가 이어지는 등 사실상 정치보복이 이루어졌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구르는 눈덩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친노(親盧)그룹 수사가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됐는지 아닌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규명될 것이다. 다만 그 실상이 지금 드러나는 것처럼 ‘친노 게이트’ 수준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사건의 핵심인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 씨의 청탁,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세종증권 주식 차명거래에 따른 수백억 원대 이익 실현, 태광실업 컨소시엄의 농협 자회사 휴켐스 인수 등은 모두 2005년 초∼2006년 중반에 일어난 일이다. 이처럼 큰 권력형 비리사건이 왜 이제야 불거진 것일까. 노 전 대통령 이전의 두 대통령은 권력형 측근 비리 수사로 임기 내에 아들이나 아들들을 감옥에 보낸 일이 있다.

더욱이 2005∼2006년은 노무현 정권이 서울 강남 부동산 부자들을 때려잡겠다며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폭탄’을 투하할 때였다. 말끝마다 ‘평등’을 얘기하며 부동산정책으로 국민을 옥죄는 동안 측근들은 고급정보를 공유하며 수백억 원대의 ‘주식잔치’를 벌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기자회견에서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노건평 씨)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직후 남상국 당시 대우건설 사장은 자살했다. 이번 사건으로 노건평 씨가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닌 게 입증된 만큼 늦게나마 남 사장 유족에게 사과하는 것이 옳겠다.

정치보복은 청산돼야 할 한국정치의 악습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악습의 뿌리는 보복의 빌미가 될 비리를 저질렀지만, 대통령의 측근이나 실세이기 때문에 임기 중에는 손대지 못하는 한국정치의 후진성에 있다.

1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정적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에 지명했다. 같은 날 한국의 전임 대통령 친형은 검찰에 소환됐다. 얼마나 지나야 정권만 바뀌면 다시 돌아가는 삼류영화를 그만 볼 수 있을지….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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