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디플레이션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에는 1930년 이전에 태어난 80세 이상 노인 인구가 1000만 명 정도 있지만 이들 역시 워낙 어릴 때 대공황을 겪었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의 참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진 못하다.
디플레이션의 경제학적 정의는 간단하다. 모든 자산 가격이 하락해 소비가 위축되고 소비의 위축은 기업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기업의 생산 감축은 실업으로 이어지고, 이는 또다시 소비의 감소를 불러 불황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국내총생산(GDP)이 줄어들고 불황 탈출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1930년대 대공황이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10년 동안 미국 GDP의 30%가 줄었고 실업률은 25%까지 올라갔다. 가장 최근의 예로 1990년 이후 15년간 복합 불황이 지속된 일본이 자주 언급되지만 디플레이션의 강도나 깊이는 대공황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글로벌 경제 상황을 ‘보통’보다 강도가 센 불경기라고 보고 있다. 문제는 자산 가격, 특히 미국의 부동산과 주식이 한 단계 더 폭락한다면 웬만한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으로는 사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본처럼 아무리 금리를 제로로 내리고 막대한 재정 적자를 감수하면서(현재 일본의 국가채무는 GDP의 150%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기 부양을 해도 먹혀들지 않는, 디플레이션이 수반되는 복합 불황의 덫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은 지금 진행 중인 불경기가 디플레이션형 악성 불경기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초유의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으로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우리 상황은 어떨까? 한국은행은 현재 우리 경제 형편을 미국보다는 위기의 강도가 낮은 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거시경제 데이터를 분석한 전문가들의 결론이니 믿고 싶지만 ‘변두리 인생’인 한국 경제에 미칠 ‘나비효과’라는 예측 불가능한 파괴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정책 실패의 마진폭을 넓게 잡아 대비해야 한다. 요행수는 없다.
이상진 신영투자신탁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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