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권희]이석행 민노총의 나쁜 선택

  • 입력 2008년 12월 8일 03시 03분


“습관적으로 맸던 빨간 머리띠를 풀겠다. 파업을 위한 파업은 하지 않겠다.”(작년 2월) “국가신인도를 확 떨어뜨리는 투쟁을 하겠다.”(올해 1월) “생산에 타격을 주는 파업을 벌이겠다. 내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파업 소리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7월) “직접 나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고 싶다.”(10월)

여러 사람이 아니라 어제 구속영장이 신청된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한 사람의 말이다. 1년여 만에 그를 돌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 위원장은 작년 초 취임하면서 “힘없는 총파업은 객기”라고 말할 때만 해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2006년 민노총이 대의원총회 의결도 못할 정도의 저조한 참여 속에 7차례 총파업을 이끌면서 국민 반감을 키운 것을 보고 그런 결심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는 ‘5%의 조직률을 3년 안에 20%로 높이겠다’고 목표를 내걸었지만 GS칼텍스와 현대중공업(2004년)에 이어 대림산업과 코오롱(2006년) 노조 탈퇴로 위축된 민노총 세력을 회복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적지 않은 현장 노동자들이 파업 지상주의의 폐해를 깨닫고 ‘회사도 살리고 노동자도 사는’ 무(無)쟁의를 선택한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강성으로 이름났던 코오롱 노조가 민노총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했을까.

민노총 내부에서도 일반 근로자의 관심사보다는 노조 간부들의 입맛에 맞는 이슈 중심으로 활동하는 ‘노조 활동가’와 노조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민노총은 노동자의 현장 관심사와 무관한 정치 이슈를 우선시했다. 7월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저지 총파업 후 이 위원장은 “파업하고 박수 받기는 처음”이라며 흥분했지만 정치파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510일에 걸친 노사갈등을 마무리한 김경욱 이랜드 노조위원장은 “민노총은 의지는 있지만 실력은 없다”고 평가했다.

민노총의 정치파업 이어가기 같은 나쁜 선택들은 이 위원장의 정계진출 가능성을 높였겠지만 민노총의 존재가치는 떨어뜨렸다. 최근 자동차 반도체 화학 화섬 제지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감산(減産) 충격으로 갈팡질팡하는 노동자들에게 민노총은 어떤 조언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금융위기가 실물 쪽으로 확산되던 10월 말 북한을 방문한 민노총 대표단을 보면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잘 드러난다. 그 직후 민노총 산하조합 간부는 ‘민노총이 친북 반미에 빠졌다’고 거세게 비난하며 민노총을 탈퇴했다.

지금 민노총은 여러 현안에서 갈림길에 서 있다. 비정규직법 개정안 논란도 그중 하나다. 더 넓게 보면 기존 정규직 노조원의 이익 확보냐, 일자리 확대냐의 선택도 해야 한다. 다는 못하더라도 이것 한 가지는 확실히 해줘야 한다. 민노총은 진짜 노총인가, 아니면 정치집단인가.

민노총은 앞으로 이 위원장 석방과 반독재를 외칠 것이다. 가동을 멈춘 공장들과 허망하게 이를 지켜보는 노동자의 모습은 민노총의 눈엔 안 보이는 것 같다. 김대모 노사정위원장이 7월 취임 직후 이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서 현안을 논의하자”고 하자 이 위원장은 “요즘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서 당분간 어렵다”고 했다던가.

구조조정 쓰나미에 일자리가 날아갈 위기인 노조원들은 민노총에 대한 한 가닥 기대마저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민노총은 경제위기 극복이나 노동현장 현안에 관해서는 의지도 실력도 없어 보인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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