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공종식]베토벤 바이러스와 엘 시스테마

  • 입력 2008년 12월 9일 03시 00분


“미인대회를 휩쓰는 나라, 우고 차베스, 석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자가 베네수엘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상 세 가지가 전부였다.(올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도 베네수엘라 출신이 우승했다.)

그나마 차베스 대통령이 국제뉴스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두 가지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이런 고정관념이 깨진 것은 미국에서 한 TV 프로그램을 시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올해 4월 CBS ‘60분’을 시청하다가 ‘새로운 베네수엘라’를 발견했다.

카메라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한 빈민가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닭장 같은 집들, 범죄가 만연한 남미의 전형적인 슬럼가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빈민가 아이들이 저마다 바이올린, 트럼본 등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표정에선 열정이 묻어났다.

베네수엘라의 자부심인 ‘엘 시스테마’(El Sistema·시스템이라는 뜻)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악기를 무상으로 주고 음악을 교육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현재 30만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폴카라는 여자아이는 카메라 앞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트럼펫을 연주한다. 음악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교도소에서 음악을 접했다는 흉터투성이의 한 청년은 “음악이 나를 변화시켰다”고 고백했다.

경제학자이자 음악가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30년 전 빈민촌 어린이 10명으로 시작한 ‘엘 시스테마’를 거쳐 간 수는 80만 명에 이른다. 현재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라가 400여 개, 실내악단과 합창단이 또 400여 개에 이른다.

남미에서 ‘음악혁명’이 일어난 것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차기 상임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차세대 지휘자로 떠오른 구스타보 두다멜(27)도 이곳 출신이다.

‘엘 시스테마’ 출신 중에서도 최고는 베네수엘라가 자랑하는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뽑힌다.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전 세계 순회공연을 하는데 14, 15일 내한공연을 갖는다고 한다. 한국 공연에서 지휘는 두다멜이 맡는다.

요즘 한국에서도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방영됐던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효과다. 이 드라마는 강마에(김명민 분)라는 지휘자를 중심으로 ‘주변부 인생’ 출신 단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성장하는 것이 중심 줄거리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클래식 공연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클래식 악기 매출도 늘었고, 뒤늦게 악기를 배우려는 일반인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 더구나 클래식 악기 연주는 여유 있는 계층이나 음악 전공자가 아니면 ‘가까이 하기 힘든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입시경쟁이 치열한 국내 교육현실에서 클래식 음악교육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가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 시스테마’ 사례는 감동적이다. 한국에서도 “클래식 음악은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절대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성공할 수 없어”라는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엘 시스테마’와 ‘두다멜’이 나오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처럼 말이다.

공종식 국제부 차장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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