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을 향한 비판의 요지는 금융위기 대응이 굼뜨며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상을 준 것은 1차적으로 당사자인 한은의 책임이다. 임시 금융통화위원회까지 열어 10월 이후 세 차례나 금리를 낮췄지만 시장의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찔끔 인하’로 꽉 막힌 돈줄의 물꼬를 트는 데 실패했다. 은행채를 사주거나 채권안정기금에 돈을 댈 때는 ‘시장 정상화’라는 큰 목표보다는 소소한 규정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였다. 돈이 급해 쩔쩔매는 사람을 세워놓고 면전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대니 뭉칫돈을 내놓고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한은이 금리를 더 낮춰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압박했다. 은행들이 돈줄을 죄고, 기업의 자금 사정이 나빠질수록 한은을 원망하는 목소리는 커졌다. 금리가 치솟는 것도, 성장률이 곤두박질치는 것도, 이로 인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죄다 중앙은행 탓이 돼 버렸다.
‘동네북’ 신세가 된 한은 뒤에서 혹시 정부 관리들은 속으로 웃지 않았을까. 돈이 돌지 않는 것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금 거래의 주체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신용경색에 갇혔기 때문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정부와 한은으로부터 지원 받은 돈은 30조 원이 넘는다. 금고에 돈을 쌓아놓고도 은행들은 채권을 추가로 찍거나 대출금 회수에 나서 시중자금을 빨아들였다. 업종마다 구조조정을 통해 서둘러 옥석(玉石)을 가려내라는 요구가 많았지만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정책의 실패가 유동성 위기를 키운 주범(主犯)인 것이다.
미국 행정부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위기 초기 국면에 이미 시장의 추가 실패를 막기 위한 공조에 합의하고 행동에 나섰다. FRB가 체면을 버리고 개별 기업에 직접 자금을 지원한 것은 숱한 작전 계획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은 위기 돌파에 유효한 공조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못했고 최적의 역할 분담을 도출해 내는 데도 실패했다.
정부조직법의 정신에 따르면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금융과 실물의 사령부는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가 맡아야 한다. 사령부가 적진 돌파의 작전을 짜고 진격 명령을 내릴 즈음에 맞춰 후방에서 화력을 공급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역할이다. 한은 일각에서는 관료들이 책임을 은근슬쩍 떠넘겼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목표물을 정하지 못한 사령부의 잘못이 크지만 산발적인 포격으로 효과를 떨어뜨린 한은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내야 할 가능성이 크다. 힘들 때마다 경제주체들은 발권력을 가진 한은에 의지하고 싶어 할 것이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금융위기를 맞아 중앙은행이 시장과 소통하는 방식에도 파격을 고민할 때가 됐다. 상처받은 시장을 달래기 위해 필요하다면 ‘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금통위원들부터 새벽 인력시장에라도 나가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을 현장에서 확인하라. 그렇게 결정된 금리라면 시장의 동의를 받기가 쉬울 것이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