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메모리] 하키전설 임계숙 “삶이 힘들땐 ‘지옥의 전훈’ 떠올리죠”

  • 입력 2008년 12월 15일 08시 31분


KT고객센터 과장으로 제 2인생

《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차범근, 선동열, 박찬호, 허재, 강만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역대 한국최고의 구기종목선수들이다. 이 가운데 임계숙(45)이라는 이름이 낀다면 어떨까. 아마 그녀의 플레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잠시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임계숙은 A매치 103경기에서 127골을 기록한 여자하키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다. 하지만 비인기종목에는 ‘전설’이 없다. 하키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그녀의 이름 석자도 쉽게 잊혀져갔다. 임계숙은 1992바르셀로나올림픽을 끝으로 스틱을 놓고, 새 삶을 찾았다. (주)KT 천안지사 성환지점 고객만족팀에서 일하고 있는 임계숙 과장을 만났다.

○후배들이나 인터뷰 하시지…

성환지점에 들어서자 고객과 상담을 하고 있는 임 과장의 모습이 첫 눈에 들어왔다. 입가에 띤 미소며, 나긋나긋 해지절차를 설명하는 목소리까지. 한 뼘은 더 큰 호주 수비수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이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하키 하던 시절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후배들이나 좀 많이 (인터뷰) 해주세요.” 더듬더듬 시작했던 옛날이야기는 어느 새 선명해져갔다. 한국하키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서울올림픽 호주와의 일전을 이야기할 때면 아쉬움에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까지. 단 30분 만에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에서 하키의 화신으로 돌아왔다.

○골이 있는 곳에 임계숙이 있었다

임계숙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을까. 하키협회 양성진 사무국장은 “A매치에서 100골 이상을 뽑아낸 선수는 임계숙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단언했다.

하키가 축구보다 상대적으로 골이 더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1경기에서 1골 이상을 뽑아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차범근의 기록이 A매치 121경기 출전에 55골(추정)이다. 임계숙의 신장은 160cm. 선수시절 100m기록은 14초F로 대표팀에서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녀의 강점은 감각적인 드리블과 탁월한 위치선정, 그리고 골 결정력에 있었다. 대표팀동료였던 정상현(44)은 “(임)계숙이는 항상 패스하기 좋은 위치에만 있었다”고 했다. 70분 내내 필드를 누빌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계숙의 능력은 득점에 한정되지 않았다. 상대 수비수 2-3명을 자신 쪽으로 몰아 아군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베이징올림픽대표팀 한진수 코치는 “한국에서 저런 선수가 다시 나온다면, 올림픽금메달은 한국의 차지”라고 했다.

○최첨단 분석시스템도 무력화시킨 하키의 여제

1989년 서독에서 열린 제2회 여자 챔피언스트로피대회. 네덜란드는 한국의 예선전 경기화면을 입수해 임계숙의 움직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구성했다. 최첨단기술을 앞세운 네덜란드는 임계숙의 드리블 방향과 문전 동작을 간파했다. 하지만 이 모든 분석도 천재의 감각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임계숙은 볼트래핑만으로도 상대 수비 2명을 제칠 정도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트래핑 이후에는 예선과는 전혀 다른 드리블 패턴으로 네덜란드의 사전학습을 무력화시켰다. 네덜란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한국은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자존심을 버려야 자존심을 살린다

임계숙이 하키를 시작한 것은 온양여상 1학년. 하키부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따라갔다. “그냥 운동이 좋아서”였다. 금방 두각을 나타낸 그녀는 1981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1992년 은퇴의 순간까지 태극마크를 떼지 않았다.

여자하키는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략적으로 육성됐다. 1981년 소집된 대표팀은 큰 멤버교체 없이 7년간 한솥밥을 먹었다. 임계숙, 정상현, 장은정, 황금숙, 진원심 등 서울올림픽은메달의 주역들은 여자하키의 황금세대. 첫 국제대회였던 1981년 제1회 아시아여자선수권에서 5위에 그쳤던 대표팀은 과감한 해외전지훈련으로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호주전지훈련 때의 일이다. 경기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호수가 있었다. 현지 클럽 팀과의 연습경기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대표팀. 16명의 선수들은 8명 씩 두 조로 나뉘어, 호수 둘레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뛰는 ‘기합’을 받았다. 이미 경기의 피로감으로 녹초가 된 몸. 임계숙은 눈물을 흘리며 2km를 전력 질주했다. ‘아, 그냥 저 호수에 풍덩 빠져버릴까.’ 하지만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죽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결국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골을 넣는다는 것은 목숨처럼 소중했다. 임계숙은 “지금도 힘들 때면 그 시절을 생각한다”고 했다.

○하키나 사회생활이나 인내심이 있어야 잘하죠

눈물과 땀으로 준비한 서울올림픽 결승전. 상대는 세계최강 호주였다. 한국은 예선전에서 임계숙이 3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호주와 5-5로 비겨 기대감이 높았다. 경기장에는 대통령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대표팀은 0-2로 패하며 금메달을 놓쳤다.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임계숙은 “경기 끝나고 운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스틱을 잡았지만 4년 뒤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의 한을 풀지는 못했다.

한국통신 소속이던 임계숙은 이후 과장직급을 받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필드에서는 누구보다 저돌적이었지만 처음에는 ‘잘못된 것은 없는 지’ 결재서류에 도장 한 번 찍는 것도 어려웠다. 자신보다 5-6세나 나이가 많은 부하직원들과의 관계맺음도 쉽지 않았다. 그 때마다 ‘자존심을 버려야 자존심을 살릴 수 있다’는 교훈을 떠올렸다.

첫 번째로 발령받은 곳은 고객 상담부서였다. 불만에 찬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왜 전화요금이 이렇게 많이 나왔냐”며 막무가내로 달려들면서 “전화국을 폭파 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고객을 이해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임계숙은 “힘든 운동을 견뎌낸 경험이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다”며 웃었다.

○후배들이 금메달 한 풀어주기를…

때로는 핏대를 세우다가 임계숙의 명찰을 보고는 “하키 선수가 아니었냐”며 한 발 물러서는 고객들도 있다. “선수시절 팬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스틱을 잡은 듯 손이 꿈틀거린다.

임계숙은 여전히 1년에 한·두 번 OB모임에 나가 필드에 선다. 연습경기를 펼쳤던 하키대표팀 김종은(22·아산시청), 김미선(25·KT)은 “처음에는 살살하시다가도 땀이 좀 나기 시작하면 여전히 한두 명 제치는 것은 우습다”고 했다.

임계숙의 바람은 후배들이 자신의 금메달 한을 풀어주는 것이다. 2008년 8월은 임계숙에게 잔인한 달이었다. 근무시간에 경기가 펼쳐질 때면 컴퓨터 앞에 앉아 베이징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우리 때는 지금보다 지원이 훨씬 좋았어요. 실업팀에서는 선수들에게 정직원 신분을 보장해줬고, 해외전지훈련도 마음 놓고 갔지요. 이 정도 여건에서 세계 최강팀들과 대등하게 싸운 후배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마무리는 역시 하키후배들 이야기였다. 바깥쪽을 향할 듯하다 다시 안쪽으로 구부러진 하키스틱의 헤드처럼, 하키를 떠났지만 다시 하키를 향해있는 그녀의 마음. 임계숙은 천상 여자하키사상 최고의 포워드였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화보] 前 국가대표 여자 필드하키 선수 임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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