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지의 대기업 총수답지 않게 그는 소탈하고 솔직했다. 다소 결례일 수도 있는 젊은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도 웃으면서 받아넘겼다. 몇 달 전 어느 모임에서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최고경영자(CEO)의 연륜(年輪)은 더해졌지만 격식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모습은 여전했다.
구 회장은 취임 후 몇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기업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외환위기 충격으로 회사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까지 갔다. 원치 않게 반도체 분야를 내놓아야 했던 반도체 빅딜 때는 조여 오는 권력의 압력을 피해 자주 일본으로 건너가 혼자 통음(痛飮)하면서 울분을 터뜨렸다. 한때 LG카드 부실 사태와 주력 계열사 실적 부진으로 마음고생도 했다.
하지만 ‘구본무 LG호(號)’는 이런저런 암초 앞에서도 지금까지 순항해왔다. 과거 한 식구였던 GS나 LS그룹이 계열 분리했지만 기업 외형과 내실은 더 튼튼해졌다. 성공적 지주회사 체제 도입과 정도(正道) 경영 노력도 눈에 띈다. GS 등과 헤어지는 과정에서 그 흔한 재산싸움 잡음이 안 들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표현했다. 전·현직 임원이 개인적 불만으로 ‘회사 등에 칼을 꽂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기업문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원인이 겹쳤겠지만 총수인 구 회장 특유의 리더십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LG가(家)에 내려오는 전통적 유교문화의 긍정적 토대 위에 조직관리상 도저히 방치해선 안 될 때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사람을 아끼는 마음 씀씀이가 경영 스타일에 녹아 있다. 이른바 ‘인덕(仁德) 경영’과도 맥이 닿아 있다.
구 회장은 인화(人和) 중시가 자칫 빠질 수 있는 적당주의를 타파하고 임직원들에게 치열한 경쟁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1등주의’를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내부경쟁 과열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인간존중 경영을 잊지 않았다. 강유식 ㈜LG 부회장이나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 등 그를 보좌하는 주요 전문경영인 역시 실력과 함께 이런 덕목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 구 회장이 계열사 CEO들에게 지시한 내용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으면 안 된다”는 발언을 취재한 후배 기자의 첫 보고를 받았을 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기업인이, 적절한 화두(話頭)를 던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앞으로 두고두고 인용되면서 우리 재계에서 잊혀지지 않는 어록(語錄)으로 남을 것이다.
LG는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의 하나다. 다른 기업들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지만 나는 우리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LG가 한층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구본무 리더십’이 이를 견인하는 촉매제가 됐으면 한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아끼고 격려하는 리더십이 조직경쟁력을 높이고 성장을 이끌어낸다면 글로벌 경제위기로 힘들어하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권순활 산업부장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