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조경란]말하기와 쓰기

  • 입력 2008년 12월 19일 03시 00분


동쪽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니 이곳 버클리에도 겨울이 와 있었다. 연사흘 주룩주룩 비가 내리더니 강풍에 기온도 뚝 떨어졌다. 캘리포니아답지 않게 왜 이렇게 추운 걸까, 투덜거리면서 여행지에서 산 장갑을 끼고 학교로 갔다. 학기가 끝날 때라 벌써 빈 강의실이 눈에 많이 띄고 학생들도, 가깝게 지냈던 한국학센터 직원이며 몇몇 사람도 가족과 함께 긴 겨울 휴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버스정거장에는 쓰던 자동차나 가구 같은 것을 판다는 전단지가 빈틈없이 붙어 있다. 이제 곧 버클리 전체가 텅 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한 보름 후쯤이면 나도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오래된 삼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내가 이 교정 안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소로 갈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9월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홈리스와 부랑자, 그리고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들을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 ‘말하는 사람들’은 버스정거장이나 도로 한가운데, 카페 앞이나 특히 교정에 많았다. 비가 오는 날 우산도 없이 검은 옷을 입고 우뚝 선 채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버클리 교정의 ‘자유발언대’

그 장면이 내게 주는 어떤 고독함이나 상징 같은 것도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저렇게 많을까 혹은 저렇게까지 무슨 할 말이 있나 하는 호기심이 컸다. 학교 ‘루드빅 분수’와 ‘스프라울 홀’이라는 건물 사이, 광장 바닥에 동그란 동판이 하나 있다. 꼭 우리식의 상수도 뚜껑같이 생겨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남쪽으로는 학교 ‘남문’이 있고 반대편에는 교정과 시내를 잇는 가장 큰 도로가 있어 매일 수천 명의 학생과 학교를 찾는 방문자가 지나다니게 되는 장소다.

이 동판의 명칭은 ‘자유롭게 말하는 공간’이다. 1960년대 초, 학교 내에 공권력이 투입된 일을 계기로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기념물이라고 한다. 상수도 뚜껑 같은 동그란 동판에 들어가서는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해도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나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동안 거의 매일 이 광장을 지나쳤다. 보라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남자가 매주 와서 현 정치에 대해 개탄을 하거나 등록금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하소연하는 여학생, 모피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남자, 어제 연인과 헤어졌다며 우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스프라울 광장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분수 가장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늘 듣기만 하던 내가 지난가을 어느 날인가 동판 위로 슬그머니 걸어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를 오해하거나 혹은 억견(臆見)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니면 나 자신에게. 얼마쯤 그 위에 말없이 서 있다가 뚜벅뚜벅 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비 오는 겨울 오후라 그런지 광장은 어느 때보다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누구도 바로 지난주의 어느 온화한 바람 속에서처럼 분수 옆에 앉아 토론을 하거나 햄버거를 먹거나 책을 보지 않는다. 모두 어깨를 웅크린 채 그냥 지나쳐 가기 바쁘고 오늘은 ‘말하는 사람’도 안 보인다. ‘자유롭게 말하는 공간’ 위로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작가의 운명이란…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고 싶은 본능을 갖고 있다. 비밀이 지켜지기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말을 하고 싶은 본능처럼, 인간은 또한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말을 하든지, 그것을 글로 쓰든지 두 가지 행위는 결국 말과 글을 통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를 갖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작업일지 모른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대로, 쓰는 사람은 쓰는 사람대로의 지켜야 할 도덕이나 의무 같은 게 있을 것이다.

특히 ‘작가’는 ‘중얼거리는 말’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통일된 작품을 쓰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쓰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보다 쓰기를 더 좋아하기도 할 터이다. 말을 하고 싶은 순간도 많지만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말하기보다 쓰기, 어쩌면 그것이 작가의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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