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투데이]위기대응 답답한 한국

  • 입력 2008년 12월 19일 03시 07분


고전 서부 개척 영화의 전형은 이렇다. 이주민 역마차가 서부를 향해 대평원을 가로질러 간다. 다들 농장을 일구고 목장을 만들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 몰고 가던 소나 말이 죽는가 하면 노인들은 병들고 가끔 일행 중 한 명이 말썽을 일으킨다.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달할 무렵 별안간 인디언이 역마차를 습격한다.

무시무시한 공격으로 거의 전멸할 무렵 기병대가 당도한다. 남녀 주인공은 무사히 살아남지만 역마차는 불타고 선량한 조 아저씨와 메리 아줌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요즘 우리 기업들의 처지가 서부 개척민 역마차 신세다. 외환위기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천신만고 끝에 딛고 일어서려는 찰나 느닷없이 출현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습격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다.

한 달 사이 자동차 판매 대수가 30% 추락하고 건설업은 빈사 상태다. 여기저기에서 감원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재산은 반 토막 나고 마지막 보루인 역마차, 부동산마저 불타고 있다.

어려운 고비를 용케 견뎠던 업체도 쓰러지고 믿었던 주력 업종마저 중상을 입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기병대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물론 당국의 고민도 깊다. 우리 혼자만의 문제라면 용을 써보겠는데 워낙 세계적인 사태라 계산이 여간 복잡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가장 큰 복병이다.

무모하게 사업을 벌였거나 부동산 광풍에 편승해 덕 좀 보자고 했던 사람들까지 구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옥석 가리기를 해야 하는데 기준이 애매하다. 돈을 푸는 것도 그렇다.

당장 수십조 원을 찍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통화가치의 하락도 걱정이고 과잉 유동성이 생산적인 곳이 아니라 물가나 올리고 투기판으로 흘러가면 정말 낭패다.

그러나 상황이 다급하다. 부작용을 겁내 항암치료를 주저할 수는 없다. 우리보다 훨씬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선진국조차 무식할 정도로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천신만고 끝에 금리를 3%로 인하하고 정부는 경기부양책으로 33조 원을 배정했다. 남들처럼 돈을 함부로 찍어내지도 않고 재정 집행도 체면치레하는 선에서 전대미문의 불경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다른 나라의 혼신의 노력에 ‘묻어가는’ 전략도 괜찮다. 다만 주인공마저 죽은 다음 도착하는 기병대가 아니기를 바랄 따름이다.

이상진 신영투자신탁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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