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서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시간이다. 죽음이 아니다. 죽는 날짜가 정해져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간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다. 어디로,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공포에 맞서기 위해 인간은 달력을 만들어 냈다.
달력이 진화해 다이어리가 됐다. 최근에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일정 기록뿐 아니라 삶의 목표, 상황에 따른 심리적 대처 방법 조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다이어리가 나온다. 심지어 다이어리 사용법에 관한 워크숍까지 열린다. 다이어리 사용자는 마치 시간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시간에 대한 근원적 불안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새 다이어리를 고르는 일은 내게도 매우 중요한 연중행사다. 한 해가 잘 풀리지 않았던 해에는 11월부터 다이어리 매장을 어슬렁거렸던 적도 있다. 빨리 지난 한 해를 잊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과거는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다가오는 미래의 방향을 결정한다.
한 심리학자가 만성질환 환자를 두 집단으로 나눠 비교 연구했다. 한 집단에는 지난 한 주간 고맙고, 감사했던 일을 다섯 개씩 적게 했다. 억지로라도 찾아 적게 했다. 다른 집단에는 불쾌했던 일을 다섯 가지씩 적게 했다. 이 일을 9주간 계속하게 했다.
9주 후, 두 집단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고맙고 감사했던 일을 적었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푹 자고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됐고, 사회적 관계도 이전과 별 차이 없이 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쾌한 일을 적었던 집단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지난 한 해를 기억하는 방식이 오는 한 해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한 해,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기억뿐이라면 오는 한 해도 고통스럽고 힘들어질 것이다. 후회할 일, 수치스러운 기억만 자꾸 떠오른다면 오는 한 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다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가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모두 어렵다는 이야기만 한다면 그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오는 한 해도 마냥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어렵사리 부어온 펀드도 반 토막 났다. 펀드를 권한, 은행 다니는 내 친구는 내 전화를 피한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즐겁고 행복한 일도 있었다. 우선 고등학교 다니는 우리 큰아들이 이제 사고 치지 않는다. 녀석의 사춘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전 해에 그 녀석이 사고 친 일을 모두 써보라면 원고지 1000장도 부족하다. 요즘 녀석의 성적은 여전하지만, 기분은 항상 유쾌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엄마와 동생에게도 참 잘한다. 펀드가 반 토막 난 것보다 훨씬 즐겁고 감사할 일 아닌가?
새로운 한 해를 잘 맞이하려면 지난 한 해 동안 감사하고 즐거웠던 일부터 기억해야 한다. 새 다이어리의 첫 장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즐거웠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자. 그러면 오는 한 해, 그 즐거운 일이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지난해 고맙고 감사했던 사람 3명만 기억하자. 그들의 이름과 고마웠던 일에 대해 자세히 적어보자. 그러면 오는 해에는 고마운 사람이 6명, 9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내 2009년은 온통 잘될 일뿐이다. 새 다이어리를 샀기 때문이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