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주향]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 입력 2008년 12월 22일 02시 58분


그것은 한 인생의 끝이었다. 하늘에서 날아온 전투기로 인해 아내가 죽고 어린 딸들이 죽고, 딸의 산바라지를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장모도 죽었으니. 혼자 살아남은 생은 차라리 부조리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상실의 고통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든 이름을 떠나보내고 어떻게 생을 지탱할까, 샌디에이고의 한인 윤동윤(37) 씨는.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과 같을 텐데. 운명에 짓눌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이 가벼워질 때까지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평생을 울어야 할 텐데. 누가 그의 삶을 산산조각 냈는가.

조종사 용서하고 기부한 美교포

그런데 원수를 사랑한다는 일이 저런 모습인가. 그는 불행 앞에서도 조용했다. “전투기 조종사도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전투기가 추락하기 직전 낙하산을 타고 탈출해서 혼자만 살아남아 죄책감에 시달릴 그 조종사를 용서한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문장이 화로가 되어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처럼 가슴이 따뜻해진 사람의 선한 후원금이 도처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후원금은 그에게는 돈이 아니라 먼저 간 가족의 혼이었나 보다. 그는 후원금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에 떠놓은 정화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생이 끝나 헤맬지 모를 사랑하는 혼을 위해 길을 안내해 주는 홀연한 천도재라고.

크나큰 상실을 사랑으로 바꾸는 저 삶의 내공은 어디서 온 것인지. 나는 부디 그가 그 내공으로 망각하고 싶은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잘 품어내기를 기원한다. 그 내공의 일정 부분은 그의 아내로부터 연유한 것이리라. 그의 아내는 기부를 즐겨 했었나 보다. 그가 기부 이유를 “생전에 기부를 즐겨 했던 아내의 뜻에 따른 거”라고 한 걸 보면.

지독한 불행 속에서도 그는 사랑을 건져 올려 나눠 주는데, 멀쩡한 우리는 왜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해서 우리는 마음속 사랑의 보배창고를 꼭꼭 잠가 놓고 이기적으로 피곤하게 산다. 사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도 없고 나눌 것이 없는 사람도 없다. 간디와 함께 비폭력 평화운동을 펼쳤던 인도의 성자 비노바 바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부자라면 베풀어라. 당신이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베풀어라. 못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육체적 힘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베풀 것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한다.”

베풀고 나눌 것이 돈뿐이겠는가

천국에서는 모은 것이 아니라 베푼 것만이 내 것이라고 하지 않나. 꼭 돈일 필요는 없다. 시간 내주기, 공감해 주기, 무엇보다도 기다려 주기…. 이상하다. 내게서 나눠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만큼 내 사는 세상이 따뜻해지니.

나눔은 자기과시여서도 못쓰지만 강탈이어서도 안 된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기부에 대한 과시는 어림의 증거니 귀엽기나 하다. 그러나 좋은 일인데 왜 동참하지 못하느냐며 억지 춘향을 만들려 한다면? 기꺼이 기부한 것이 아니라 강요에 못 이겨 뜨악한 마음으로 억지로 내게 된 것이라면 거기에 무슨 따뜻함이 오가겠는가.

선의 강요는 악만큼이나 나쁘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며 전 재산을 기부한 청룽(成龍)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그 행위야말로 무상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의 자연스러운 춤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려서 흐르는 돈이 자비고 흐르는 시간이 사랑이다. 마음이 열리면 아까울 게 없다. 그 마음을 열게 만드는 건 기술도, 도덕도, 사상도 아니다. 차라리 운명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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