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울 때일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옛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스포츠동아는 스토브리그 동안 팬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 추억 속의 스타를 찾아가는 ‘피플 인 메모리’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은퇴 후 스포츠계에 몸담고 있지 않아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왕년의 선수’. 그들이 개척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인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5월부터 8월까지 중·고등학교 운동부 11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학생선수는 하루평균 4.485시간, 대회가 있을 때는 1.91시간만 수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7년 말,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학생선수는 10만 명이 넘는다. 전체학생 1%의 학습권이 방치돼 있는 꼴이다.
이것이 바로 ‘체육 강국’ 대한민국의 허상이다. 한 개의 금메달을 위해, 운동을 중도에 포기하는 수 만 명의 인생은 내동댕이쳐진다. 심지어 메달리스트들까지도 진로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학업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삶도 가능하다.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금메달리스트에서 IT사업가로 변신한 이은철(41)을 만났다. 학생선수의 학습권 침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은철은 12월, 동아대에서 열린 스포츠기본법 제정을 위한 모임에서 ‘학생선수의 비교육적 훈련의 현황과 과제-외국사례와 비교’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격천재? 컴퓨터 천재!
이은철은 분당에 위치한 실리콘밸리테크의 CEO다. 미국 실리콘밸리 3개 IT기업의 한국지사장을 맡고 있고, 최근에는 통신부품 개발업체 인텔라(Intelra)까지 설립했다.
중학교 1학년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컴퓨터게임에 빠져, 나중에는 직접 프로그래밍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고등학생신분으로 사격비공인세계신기록을 작성한 84년, 이은철은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도 입학제의를 받았다.
실리콘밸리테크 고희경 부장과 두혜영 대리는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할 때면 사장님이 정말 천재구나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은철의 이야기는 달랐다.
“천재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미국은 수업이 오후 2-3시면 끝나거든요. 저녁까지 사격장에서 총을 쏘고, 집에 와서 숙제를 했어요. 학업에 대한 강박도, 운동에 대한 부담도 덜했습니다. 시스템이 다양한 재능을 꽃피우게 해 준거지요.”
○내 생애 최고의 코치, 어머니
이은철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운명처럼 사격을 만났다. 인천자유공원 견학을 가던 날. 우연히 코르크 총으로 인형을 맞히는 게임을 하게 됐다. 쏘는 족족 인형이 떨어졌다. 주인은 울상을 지었고, 이은철은 친구들 몫까지 잔뜩 인형을 챙겨왔다.
“총을 잘 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에요. 사실, 코르크 총은 굉장히 불안해서 제대로 조준을 해도 빗나가게 마련이거든요. 운이 좋았죠. 그래서 운명인가 봐요.”
어머니에게 총을 쏘게 해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사격장으로 아들을 데려갔다. 그렇게 한 달을 연습하고, ROTC 출신 아버지와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제가 이기면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생애 첫 경기이자, 가장 숨을 죽였던 경기였다. 결과는 이은철의 신승. 그렇게 정식선수가 됐다.
미국에서도 사격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였다. 어머니 박인화씨는 첫 번째 개인코치였다. 혼자서 두꺼운 사격교본을 독파한 어머니는 이은철의 사격자세를 꼼꼼히 확인할 정도로 수준 높은 지도자였다.
총알까지 직접 만들어,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화약의 종류와 양을 조절할 정도의 장인이기도 했다. 결국 84년, 이은철은 선발전 없이 태극마크를 다는 특별대우를 받으며 LA올림픽대표로 뽑혔다.
○인간의 능력에 한계란 없다
이은철은 84년, 세계선수권 8회 우승에 빛나는 레니 베상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텍사스로 향했다. 입학할 대학도 그곳에서 정했다. 전공은 컴퓨터과학. 베상 코치는 의식과 무의식, 자아를 넘나드는 정신집중이론의 대가였다.
단 한번도 자세에 대한 지도는 없었다. 이은철은 ‘맞힐 수 있다는 생각에 의심이 생기는 만큼 총알은 빗나가게 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신조는 지금도 ‘긍정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이다. 주요사업이 틀어져도 “위기는 기회”라는 말로 직원들을 다독일 수 있는 이유다.
“인간능력에 한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운동과 공부도 충분히 동시에 즐길 수 있어요.
사격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소총·화약총·클레이까지 모든 종목을 다 잘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단기간의 성적 때문에 보통 한 가지만 시키려고 하죠. 원리만 알면 결국 모든 종목의 성적이 다 올라가는데 말입니다.”
○실패를 딛고 딴 금메달
87년, 이은철은 소총·화약총·클레이 등에서 14개의 한국기록을 쏟아냈다. 서울올림픽에서 그의 금메달은 기정사실화됐다.
오도된 긍정은 자만으로 바뀌었다. 결국 결과는 노메달. 결선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총을 내려놓고, 홀연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전까지 휴가를 받아도 절에 들어가 단전수련을 할 정도로 사격에만 미쳐있었거든요. 그 때는 자살결심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때의 실패가 이후 삶의 큰 보약이 됐죠.”
공부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렸다. 표적을 향했던 매서운 눈매는 전공서적으로 향했다. IT전문가로서의 실력은 시나브로 커가고 있었다. 덕분에 서울올림픽 이후 졸업학기까지의 학점도 거의 A였다.
90년, 대한사격연맹은 또 한번 깜짝 제의를 했다. ‘선발전 없이 태극마크를 달아줄 테니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다시 총을 잡았다. 사격은 마인드가 70%. 2년 가까이 총을 놓았지만 그의 정신은 강해져있었다. 3개월 만에 출전한 세계선수권에서 2관왕. 마침내 92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소구경소총복사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업은 수단, 내 꿈은 장학재단설립
이은철은 2000시드니올림픽까지 5회 연속 올림픽에 나선 뒤 은퇴했다. 소속팀이던 한국통신(현KT)에서 3급(본사과장) 정직원 신분까지 약속했지만 전공을 살리고 싶어 미국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엔지니어의 길을 걷던 이은철은 2002년, IP인퓨전(Infusion) 한국·대만 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이은철은 회사매출의 25%를 담당할 정도로 엄청난 수완을 발휘했고, 결국 2005년 실리콘밸리테크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일레콤(ele-com)이라는 회사와 합작으로 사격선수 출신만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락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격시뮬레이션의 위상을 실제사격술이 향상되는 정도로 올려놓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총의 반동은 물론, 격발의 미세한 느낌까지도 고스란히 사람의 몸에 전달된다. 만약, 상용화된다면 전 세계 군대의 화기훈련에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은 이 일이 재밌어서 하고 있지만, 사업은 수단일 뿐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거 좀 말씀드리기가 곤란한데….” 몇 번을 추궁(?)해서야 얻은 답은 장학재단설립.
유복하게 자란 이은철은 시드니올림픽에서 강초현을 만나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어요. 부잣집 외동딸인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강초현에게는 어려운 경제적 사정이 있었다. 이은철은 전담코치를 자청했고, 사격장비등을 내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강)초현이가 메달을 따는 순간, 제가 메달을 딴 것 보다 더 기쁘더라고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되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삶의 방향을 잡아주었으니 (강)초현이는 제 삶의 은인이지요.”
둘은 지금도 의남매로 지낸다. 강초현은 “(이)은철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절대로 메달을 따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요즘도 공부하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의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는 예일대 야구부의 주장이었다. 현 대통령 버락 오마바 역시 대학교 때까지 농구선수였다. 이은철이 성공한 사업가로 남아야 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학업과 운동이 분리된 한국체육계에 삶 자체로써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리고 연말연시의 추위가 더 시린 이들에게도 따뜻한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총을 내려놓은 지, 8년. 하지만 그의 가슴 속 총구의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분당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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