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여의도 체질

  • 입력 2008년 12월 29일 20시 02분


당신이 마이크 잡고 말하길 즐긴다면, 그것도 청중이 많을수록 신이 난다면, 더구나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한 것도 쉽게 잊어버리는 ‘능력’이 있다면 국회의원 출마를 권한다. 타고난 ‘여의도 체질’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올 2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회의장까지 옮겨가며 강제 상정했다. 1년도 안 돼 같은 사람들이, 같은 안건의 상정을 막기 위해 해머와 전기톱까지 동원해 국회를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만들어버렸다.

전대미문의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각국 의회가 경제 살리기에 총력전을 펴는데도, 저 여의도라는 섬에 고립된 이들은 경제 민생 살리기 법안을 한 아름 쌓아 놓고 쌈박질로 날을 지새운다. 이런 낯 두꺼움과 망각 능력을 특이체질이라는 용어 말고 달리 어찌 설명하랴.

평상시 여의도 체질의 특징을 살펴보자.

먼저 이들은 아침의 주요당직자회의에서든, 오후의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든 하루에 몇 번이고 만날 때마다 악수한다. 단, 카메라가 비치지 않는 곳에서도 악수하는지는 모르겠다.

또, 공개석상에서는 서로를 부를 때마다 이름 앞에 ‘존경하는’이란 수식어도 붙인다. 계속 존경하면 좋으련만, ‘존경하는 ○○○ 의원’ 하고 부른 뒤 조금 있다가는 쌍욕을 퍼부으며 드잡이를 벌이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각종 연장까지 동원해 싸우다가도 기득권을 지킬 땐 여야 가릴 것 없이 ‘우리가 남이가’ 하며 똘똘 뭉치는 것이다. 17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는 부적절한 언행을 한 의원 관련 사건 17건에 대해 징계를 결정했다. 하지만 징계를 발효시킬 본회의에는 단 한 건도 상정하지 않았다. 윤리위는 14대 국회부터 현재까지 150여 건을 처리했지만, 단 한 건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았다.

민의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국회 출입기자 시절 존경할 만한 의원도 적지 않게 만났다. 또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뭔가 배울 게 있는 분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국회가 어째서 21세기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고, 고단한 민생에 재를 뿌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까. 바로 국회의원이라는 자리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국 사회에서 국회의원은 연간 2억 원에 가까운 세비와 각종 국가 지원을 받는 출세한 인사, 입법권력을 행사하는 공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자리에만 오르면 그때까지의 전 인생이 보상받는 ‘인생역전’의 상징이다. 하급 공무원 출신이 장관 출신을 이기고, 빈자가 부자를 누르기도 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날, 특히 지역구에서 치열한 싸움 끝에 당선된 이들은 인생 최고의 환희를 느낀다는 게 공통된 경험담이다. 한 재선의원은 첫 당선 직후 여의도 국회의 야경을 보면서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본 일이 있나”라고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그 ‘아름다운 건물’의 입주자들은 거기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모든 걸 건다. 차기 공천을 위해서든, 지역구 민심을 의식해서든 기꺼이 연장을 들고, 몸을 날린다.

언제쯤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보다는 ‘1인 헌법기관’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이들이 넘치는 ‘일하는 국회’를 볼 수 있을까. 차라리 ‘국회의원 단임제’라도 도입했으면 하는 요즘이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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